삼국시대에 백제를 제외한 고구려와 신라에 종묘가 설치되어 있었음은 중국 사서와 삼국사기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 중에서도 중국의 정치제도와 사상 및 문화를 가장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백제에서는 종묘제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그러나 백제에 종묘와사직이 설치되었음은 삼국사기, 남제서, 일본서기 등에 단편적이지만 ‘종묘와 사직’이라는 용어가 나오는 것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5세기 초 아신왕 사후 일어난 왕위계승의 분쟁을 극복하고 즉위한 전지왕은 왕권을 안정시키기위해 왕 4년(408)에 상좌평을 설치하였으며, ‘봉원(奉元)’이라는 연호를 반포하였다. 부여, 고구려와 유사한 동명 신화를 갖고 있던 백제는 410년(전지왕 6) 동부여의 멸망과 고구려의 복속이라는 상황에서, 동명에서 온조로 그 건국시조의 위상을 변화시켰다. 부여 시조로서의 동명과 백제의시조인 건국자의 존재를 분리한 형태로 나타났다. 기존의 동명묘를 폐지하고 새로운 국가 시조로온조를 모시는 공간으로 종묘를 만들었던 것이다.
백제의 종묘와 관련된 고고학적인 자료로는 서울 풍납토성 경당지구에서 조사된 44호 건물지, 9호 유구, 206호 우물 등을 들 수 있다. 이 유구들의 공통점은 모두 제사와 관련된 시설물들이라는점이다. 따라서 경당지구는 종묘구역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종묘의 중요한 시설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206호 우물에서 출토된 유공광구장군(有孔廣口橫甁)이나 유공광구소호(有孔廣口小 壺)는 5세기 초부터 출현하는 토기이다. 이로 보아 종묘는 5세기 초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206호 우물 내부에서는 완형으로 발견된 215점의 토기 가운데는 충청과 전라 지역에서 제작한 것이 여러 점 포함되어 있다. 215점 대부분의 토기에는 제사에 사용된 토기에서 흔히 볼 수있는 파손 흔적이 남아 있다. 이는 종묘를 설치하고 이를 기념하는 의식을 행하였을 때 지방의지배층들이 참여하였을 가능성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 의식에 초대된 지방의 지배층은 토기에각 지역의 특산물이나 성스러운 물을 토기에 담아 참석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의식이 종료된 이후에 사용된 토기들은 구연부를 깨뜨려 우물에 매납하였다.
이는 백제의 왕실과 중앙 귀족세력, 그리고 지방세력들은 토기를 한 우물에 묻음으로써 자신들이 모두 한 우물에서 나온 한 핏줄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백제와 왕에 대한 충성을 유도하였던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새롭게 한 집안이 된 중앙과 지방세력은 영원히 번영할 것을 기원하였다.
이것은 206호 우물에서 출토된 토기 중에는 복숭아씨가 담겨져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우물에서 발견되는 여러 개의 복숭아는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며, 샘물이 마르지 않고 풍부하게 나오기를바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결국 토기 안에 복숭아를 넣은 것은 종묘 설치 이후 중앙과 지방 세력이모두 참여한 의식 이후 백제라는 국가 및 왕실의 번영을 축원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