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사(元史)』 고려전(高麗傳)은 1216년 몽골과 고려의 첫 만남부터 1322년 전후의 이른바 심왕 옹립 운동까지를 다루고 있다. 편년 기사는 세조 쿠빌라이의 재위 기간에 대해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1278년까지가 상세하다. 이는 『원사』 고려전이 1331년 완성된 『경세대전(經世大典)』 정전(政典) 정벌류(征伐類)의 고려문(高麗門)을 토대로 작성되었고, 다시 그 자료는 1276년에 황제가 편찬을 명령한 『제국신복전기(諸國臣服傳記)』의 고려 부분을 주로 참고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경세대전』의 고려문을 토대로 20세기 초에 간행된 『원고려기사(元高麗紀事)』의 내용을 『원사』 고려전의 편년 기사를 대조해본 결과, 『원사』 고려전의 1276년 이전 기사는 99% 이상 『경세대전』 고려문의 내용을 생략하거나 요약하는 정도로 작성되었음을 확인했다. 1277년 이후 기사의 사원(史源)은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전과 마찬가지로 『경세대전』의 고려문이고, 다른 하나는 『세조실록』과 『성종실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원고려기사』에는 실려 있는 내용은 『원사』 본기에 보이지 않고, 『원고려기사』에서 확인되지 않는 정보는 『원사』 본기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점이 이 추측의 타당성을 높인다.
몽골 제국은 여러 종족, 국가, 정치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자신의 판도 내에 포함되었는지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이를 밝히기 위해 여러 차례 역사서를 편찬했는데, 『제국신복전기』 역시 그 일환이었다. 이 과정에서 몽골 조정은 여러 차례 고려에 양국 관계의 역사를 정리해서 제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 측도 이 요구에 응하여, 자신이 몽골 황실과 오랜 인연을 맺어왔으며 양국 관계는 항상 우호적이었다고 적극적으로 선전하였다.
명 건국 직후 『원사』를 편찬할 때, 명의 사관(史館)에서는 고려 측에 관련 기록을 보내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의 주장이 반영되어 만들어진 원 대에 기록물들이 명 초 사관(史官)들의 손에 입수되었고, 그 덕택에 『원사』 고려전은 양국 관계를 갈등과 대립이 아닌 우호와 협력의 서사 구도로 묘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