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후반부터 조선 왕실은 국가 행사를 마친 후 이것을 기념하고 기록하기 위해 계병(稧屛)을 제작했다. 계병은 조선 전기에 사대부 사이에 유행했던 계회도(契會圖)의 제작 관습을 왕실이 전용(轉用)함으로써 이를 왕실 차원의 문화적 전통으로 계승한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계병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제작되었으며 누가 어떻게 주문하고 나누어 가졌는가가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계병은 조선 전기에 관원들 사이에서 사적으로 제작되었던 계회도의 성격과 근본적으로 유사하지만, 그 표장(表裝) 형식, 발주 및 주문의 주체, 회화의 주제와 구성 면에서 크게 바뀐 측면이 있다. 본 연구는 관원들의 계회도가 어떻게 왕실 계화(稧畵)로 정착하는지를 검토하는 차원에서 18세기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시대에 계화가축(軸)·첩(帖)·권(卷)·병(屛)으로 형식상의 각축(角逐)을 벌이다가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시대에 이르러 병풍으로 정착되는 역사를 살핀 것이다. 아울러 계병이 실제로 제작되는 과정을 규명하는 차원에서 재원(財源)이 마련되고 내입(內入)과 분하(分下)를 통해 왕실과 신료들에게 나누어지는 과정이 논의되었다. 이 전통은 19세기에 이르러 계병채(稧屛債)라는 안정적 재원을 확보하면서 20세기 초반까지 꾸준하게 이어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