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은 재위 중인 국왕의 어진을 제작하는 전통을 다시 살려 1695년과 1713년에 자신의 어진을 진전에 봉안하게 했다. 1695년에 조세걸(曺世傑, 1636-?)이 그린 숙종 어진은 2본이었으며, 1본은 강화부(江華府)의 장녕전(長寧殿)에, 다른 1본은 창덕궁 선원전(璿源殿)에 봉안되었다. 강화는 외적방어에 유리한 환경을 갖춘 지역으로 조선 시대에 전략적 요충지이자 국가의 보장처(保障處)로 인식되었으며, 숙종 이전에도 이곳에 진전을 세우고 태조 어진과 세조 어진을 봉안한 일이 있었다.
숙종은 1695년의 어진 제작과 진전 건립을 신하들에게 알리지 않고 비공식적으로 진행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신하들 중 일부가 강화의 영전(影殿) 영건(營建)을 반대하자 숙종은 비밀리에 서둘러 어진을 강화로 내려보냈다. 이후 강화 유수 김구(金構, 1649-1704)가 격식을 갖추어 어진 봉안 의식을 엄숙히 거행하도록 건의함에 따라 숙종은 어진 봉안 행사를 공식적으로 준비하게 하였다. 그는 예조의 관리들을 강화에 파견하여 정해진 절차에 따라 장녕전에 어진을 봉안하게 했다. 이때 숙종 어진은 흑칠궤에 담긴 상태 그대로 장녕전 내부 어탑(御 榻) 위에 봉안되었다.
1695년에 장녕전에 봉안된 어진은 숙종의 평소 모습을 그린 것으로, 학창의(鶴氅衣)와 당혜(唐鞋)를 착용하고 머리에 역괘고후관(易卦高後冠)을 쓴 모습의 전신상이었다. 이러한 옷차림은 조선 시대 국왕의 전형적인 어진과 큰 차이를 보인다. 숙종은 일상에서 학창의를 종종 착용한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 사대부들도 학창의와 고후관을 일상복으로 착용했다.
1695년에 봉안된 숙종 어진은 1713년(숙종 39)에 새로 그려진 어진으로 교체되었다. 1713년은 숙종이 즉위한 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숙종은 이를 계기로 새로운 어진 제작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에는 원유관본과 익선관본 어진이 각 1본씩 그려졌으며 원유관본은 강화 장녕전에, 익선관본은 창덕궁 선원전에 봉안되었다. 어진 제작을 위해 어용도사도감(御容圖寫都監)이 설치되었으며 어진 제작과 관련된 많은 사안들이 숙종과 신하들 간의 논의를 통해 결정되었다. 어진을 장녕전에 봉안하는 의식도 미리 응행절목(應行節目)을 마련하여 엄숙히 거행했으며, 왕세자와 백관들이 경덕궁의 정문에 나와 강화로 출발하는 어진을 배웅했다. 이처럼 1713년의 어진 제작과 봉안은 거의 모든 면에서 1695년과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어진을 펼쳐서 봉안하지 않고 궤에 들어 있는 상태로 어탑 위에 봉안한 것은 이전과 동일했다. 장녕전과 선원전에 새로운 어진이 봉안된 후 기존 어진은 세초(洗草)되었다. 두 곳의 숙종 어진은 그의 유언에 따라 그가 승하한 이후인 1720년에 펼쳐서 봉안되었다.
숙종이 1713년에 어진을 새로 제작한 표면적 이유는 기존에 장녕전에 봉안된 어진이 미진(未盡)하여 후대에 전하기 부적합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진’ 이라는 표현은 인물 묘사에 사실성이 부족함을 뜻하기보다는 국왕의 어진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소들이 결여되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학창의와 고후관 차림의 일상적인 모습을 그린 어진은 사대부 초상화와 외형상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숙종은 여기에 문제가 있음을 느끼고 시각적으로 국왕의 권위와 우월함이 뚜렷이 드러나는 어진을 새로 제작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새로 그린 어진을 봉안한 뒤 기존 어진들을 세초해서 없애 버린 것은 일상적인 모습을 그린 초상은 국왕의 어진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에서 나온 조치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