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그동안 불교 회화와 유교 관련 산수화로 각기 논의되어 온 〈도갑사관세음보살삼십이응탱(道岬寺觀世音菩薩三十二應幀)〉과 〈무이구곡도(武夷九曲 圖)〉 및 〈도산도(陶山圖)〉가 숭불(崇佛)과 숭유(崇儒)가 충돌하던 16세기 중엽의 조선 사회가 배태한 정치적 산수화임을 논증한다. 16세기 중엽은 국시(國是)로 내건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조선 사회에서 심화되었던 시기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시기는 유학자가 아닌 승려를 보필로 삼아 ‘여성’이 ‘숭불정책’으로 나라를 다스리던, 당시로서는 ‘부자연스러운’ 시기였다. 12세의 나이에 즉위한 명종(明宗, 재위 1545-1567)을 대신하여 모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가 8년간 섭정하면서 억불(抑佛)정책을 폐지하고 1550년에는 유생과 사대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숭불정책을 공식화하였다. 이와 같이 불교의 위세가 대단하던 1550년에 왕실의 후원으로 제작된 그림이 〈도갑사관세음보살삼십이응탱〉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대폭의 비단 화면의 5분의 4가량이 산수로 채워져 있는, 기존 관음보살도에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형식을 하고 있다. 즉 이 작품의 관음보살은 바로 뒤의 봉우리가 후광(後光)처럼 가장 높이 부각되어 그려진 오봉산을 배경으로 하단의 산악 위로 홀로 솟은 높은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이 땅에 내려와 군림하는 이미지로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중봉이 높게 표현된 오봉산의 표현은 조선시대 어좌 뒤에 설치된 ‘오봉산병풍(五峯山屛風)’의 이미지이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산악 아래 펼쳐진 세상을 내다보는 관음의 이미지는 관음의 화신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한 세조(世祖, 재위 1455-1468)가 그리게 한 ‘관음현상(觀音現相)’의 이미지와도 관련된다. 따라서 이 작품은 오봉산을 배경으로 산악으로 둘러싸인 세상을 내다보는 관음의 이미지가 곧 통치자로 읽히던 조선적 시각문화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그림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아울러 오봉산을 배경으로 산악을 내다보며 ‘국토’ 위에 군림하는 이미지로 관음보살이 그려진 1550년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던 문정왕후의 권력이 정점에 이른 해였다.
이 논문은 이렇게 관음보살 탱화가 특이하게 한 폭의 산수화와 같이 표현되었을 뿐 아니라 산악 아래로는 뭇 재난에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32응신 장면이 그려진 이유를 문정왕후 통치기의 정치·사회적 맥락 속에서 섬세하게 살펴본 글이다. 즉 이 글에서는 작품이 제작된 시기와 봉안될 장소에 대한 의미를 검토하여 이 작품이 한 폭의 산수화와 같이 그려진 의미가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동시에 이 시기에 〈무이구곡도〉와 〈도산도〉라는 도갑사 탱화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산수화가 영남 사림을 대표하는 이황(李滉, 1501-1570)과 연관되어 처음으로 등장한 연유 역시 왕실 주도의 숭불과 이황 일파의 숭유가 첨예하게 부딪히던 당시 ‘산수’ 현장과 관련된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도갑사 탱화와 〈무이구곡도〉의 화기(畵記)와 발문(跋文)이 각기 인종(仁宗, 재위 1544-1545)과 을사사화(乙巳士禍)를 환기하고 있는 이유도 이 점에서 이해된다. 16세기 중엽에 그려진 ‘산수’가 당시 여론의 향방과 직결된 정치적 산수화였음을 규명한 것이 본 논문의 의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