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의 격군심(格君心)론을 이론화하고 실제 정치제도에 활용한 것은 송대부터다. 그러나 이학의 격군심론은 이론적으로 두 가지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다. 첫째, 국왕이 이학의 수행방법을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수행하지 않으면 효력이 없었다. 둘째, 이학의 수행 방법을 군주가 수행하는 것이 정사의 성공 여부와 필연적 인과관계가 없었다. 따라서 인륜의 마음을 견지하는 것과 사공의 성취 사이에 가로놓인 비필연성을 해소하는 것은 큰 숙제가 되었다.
조선에서는 자국의 역사적 경험을 활용하는 것, 수행하기에 적합하게 이학의 수행법을 보정하는 것 양방향으로 격군론을 보완해갔다. 『치평요람(治平要覽)』과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 『성학십도(聖學十圖)』와 『성학집요(聖學輯要)』는 그 대표적 성과였다. 또한 조선 후기에 격군의 방법으로 『심경』이 널리 활용되었다. 교민(敎民)에 중점이 있는 『효경』이 중국과 일본에서 중시되었던 것에 비교해 볼 때, 조선에서 격군(格君)의 정치가 더 활발하였음을 말해준다. 이황과 이이는 성학에 대한 군주의 적극적 의지를 돕기 위해 입지(立志)를 강조하였다. 이이는 특히 입지(立志) → 수렴(收斂: 본원 함양의 소학 공부) → 교기질(矯氣質)의 순서로 수행 과정을 재구성하였는데, 군주가 자신의 기질을 통어해갈 수 있게 이학의 수행 방법을 구체화한 것이다. 군주의 수신과 선정의 성취 사이의 비필연성을 해소하기 위해 이이는 용현(用賢)을 중시하였고, 그 가운데에서도 재상의 임용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정약용 역시 「고요모」의 지인(知人)을 육경의 취지로 재해석하면서 재상의 임용을 중시하였다. 군주의 수신과 선정의 성취 사이 간극을 해소하는 것은 이학과 실학에 관통하는 조선 유학의 주요 관심사였다고 할 수 있다.
금욕이 아닌 절욕의 차원에서 신체적 욕구를 조절해가도록 군주를 유도하는 격군심론이 조선 후기에 널리 활용되었던 것, 내수사 전토의 장리 제도를 폐지시킨 것, 궁중의 사치를 억제시킨 것, 권건(權健)이 유배되었다가 재기용된 것, 그리고 궁중의 사안을 공적인 절차를 거쳐 처리하게 한 것 등은 격군 정치가 조선에서는 시종 활발하게 작동하였음을 말해주며, 동아시아 다른 왕조국가들에서 볼 수 없었던 현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