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5월 하순부터 콜레라가 발병하기 시작했던 인천 지역은 경기 지역의 주요 발병 지역이었다. 그렇지만 6월 중·하순 장마가 있고 나서인 7월 이후, 식민지 시기 황해도에 속해 있었던 연백과 옹진, 그리고 그 부속 도서들이 경기 지역의 주요 발병지가 되었다. 이는 ‘본래’의 경기 서해 연안 지역이나 내륙의 한강 강변 지역 등의 발병세가 상대적으로 약세였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지역적으로 발병세가 상이했던 경기 지역의 전체적 발병세는 남한 전체 10개 시·도 단위 지역 대비 중위적 수준의 발병세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인구 규모를 고려할 때, 경기 지역의 상대적 발병세는 ‘덜’ 심각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 경기 지역의 1946년 콜레라 사태도 여타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을 들어 종식되었다.
그런데, 인천 지역의 초기 발병은 아시아-태평양 전쟁 직후 미국이 자신의 동아시아 패권을 확립하고자 추진한 송환 정책과 연결된 것이었다. 또한, 동아시아 지역의 콜레라 병원지(病源地)였던 중국과 ‘밀무역’이 활성화된 인천과 인근 도서 지역에서의 콜레라 만연은 식민지/제국 해체 이후 근대적인 민족 국가 체제가 동아시아에 한반도에 건설되기 이전 한·중 국경선이 ‘작동’하지 않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것들이 인천 및 인근 도서 지역 만연의 국제정치적 맥락이자 함의였다. 마찬가지로, 사회 기반 시설 등이 불충분했던 연백·옹진과 그 소속 도서 지역의 악성(惡性) 콜레라 만연의 이면에는 인천, 나아가 서울 등 전국적, 지역적 중심지 위주의 차별적 방역 정책이라는 일국·지역 정치가 작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1946년 경기 지역의 콜레라 발병·만연은 세균학적인 또는 미생물학적인, 자연적 발생사이자, 종전/해방 직후 국제정치와 일국·지역 정치상의 맥락과 함의를 가진 역사적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