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부여 규암면 규암리에서 2구의 금동관음보살입상이 발견됐다. 그 가운데 1구는 국보로 지정되어 국립부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지만, 다른 1구는 일본으로 흘러가 버렸다. 이 글은 2020년 현재 일본에 있는 ‘규암리 보살상’에 대한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남아 있는 기록을 면밀히 검토하여 1922년 이치다 지로가 보살상을 소장하게 된 내력을 살피고, 2구의 금동관음보살상이 함께 발견된 규암면이 어떤 곳인지 알아보았다. 그 결과 규암리 보살상이 발견된 장소는 바로 보살상을 봉안했던 사찰 영역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규암리의 2구 보살상은 함께 묻혀 있었지만, 제작 시기는 차이가 있다. 국립부여박물관의 보살상은 7세기 전반이지만, 일본의 규암리 보살상은 의자왕(재위 641-660) 시대인 7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국립부여박물관의 규암리 보살상은 X자형 영락 장식에 커다란 손을 지닌 반면, 일본의 규암리 보살상은 2줄의 U자형 천의에 적당한 크기의 손, 유연하게 몸을 구부린 진전된 형식 및 양식을 갖췄기 때문이다. 이는 수대 보살상에 초당 보살상의 특징이 더해진 것이다. 주조 기술도 훨씬 발전해 일본 소재 규암리 보살상의 경우 천의와 영락을 한꺼번에 주조하지 않고 별도로 제작해 결합하는 방법이 사용되었다.
일본 소재 백제 금동관음보살입상은 정확한 출토지를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소중한 작품이다. 광배와 대좌를 잃었고, 몇 군데 손상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이 보살상은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조형미가 탁월한 한국 불교조각사에서 손꼽을 만큼 뛰어난 작품이다. 이 보살입상은 26cm 크기로 금동상 중 중형에 속하는데, 특히 백제지역에는 이 정도 크기의 금동입상의 유례가 많지 않아 더욱 귀한 예이다. 백제 불교미술은 7세기, 특히 의자왕이 다스리던 7세기 중엽이 최고 절정기이다. 안타깝게도 백제가 660년에 망하면서 백제 미술은 절정기 이후 내리막길을 맞이하기도 전에 급작스럽게 끝났다. 뛰어난 조형성과 주조 기술을 보여주는 일본 소재 규암리 보살상은 7세기 중엽 절정기에 달했던 백제 불교미술의 마지막 명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