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조선 후기에 정계와 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학자였다. 그는 1680년에는 김진규와 김창업으로부터, 1683년에는 화원 한시각으로부터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받았다. 〈송시열 초상 초본(방건본)〉(김진규본), 〈송시열 초상(방건본)〉(김창업 본), 〈송시열 입상〉(한시각 본)은 바로 이때 이 화가들이 제작한 초상화이거나 그것의 이모본이다. 송시열의 제자 및 문도들은 1680년과 1683년에 그가 상경했을 때 그의 초상화 제작을 계획하여 실행했다. 그들이 그의 초상화를 제작하고자 한 목적은 무엇보다 그들이 숭모하는 선사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 영원히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며 또한 그의 사후 건립될 수 있는 원사 내에 걸어 봉안하는 것에 있었다. 한편 송시열 또한 자신의 초상화를 가지고자 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추앙했던 주자가 평생 여러 차례 초상화를 제작하고 관련 글을 남긴 것을 본받아 1680년 이전에 이미 자신의 초상화를 직접 주문하고 자신의 초상화 관련 글을 썼다.
1680년과 1683년에 제작된 송시열 초상화에서 송시열은 심의나 포, 복건 등 유복을 착용한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당대에 심의나 복건은 주자를 상징하는 옷으로, 아울러 심의·복건을 포함한 유복은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한 상황에서 대명의리를 상징하는 옷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이때 제작된 초상화에서 유복을 착용한 모습으로 표현된 송시열의 이미지는 명나라가 멸망한 상황에서 초야에서 복수설치의 마음을 가진 채 주자의 학문을 계승하고 성현들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했던 그의 철학과 신념이 투영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송시열 사후에 그의 초상화는 이모의 방식을 통해 많은 복제본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이 중에는 〈송시열 초상(방건본)〉처럼 후대에 그의 문도들의 주문에 따라 부분적으로 윤색이 이루어진 초상화도 있다. 이 초상화에서 송시열은 그 복식 종류를 특정하기 어려운 건과 포를 착용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입은 포는 조선시대 고사도나 성현도 등에 서 고사나 성현이 입은 것과 유사한 형태의 것이다. 따라서 이 복식은 송시열을 주자를 포함한 옛 성현에 비견되는 ‘대현(大賢)’으로 추앙하고자 한 그의 문도들의 의사가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