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아미타구품인’에 관한 오류를 바로잡고자 시작되었다. 필자는 아미타불의 대표 수인이라 여겨졌던 아미타구품인이 후대에 만들어진 도상임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필자는 이를 위해 아미타구품인을 구성하는 아홉 가지 수인의 본래 의미는 무엇인지, 또 아미타구품인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조합된 이유는 무엇인지 등을 살펴보았다. 본 논문은 이 용어 및 개념이 언제부터 우리의 인식 속에 당연한 것으로 이해된 것인지, 그 일반화의 과정을 추적하고자 했다.
‘아미타구품인’은 아미타불상의 손 모양을 묘사할 때 흔히 사용되어 온 도상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譯 424-442)을 포함한 어떤 경전에서도 아미타구품인의 용어, 개념, 형상 등은 확인되지 않는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아미타구품인의 전형은 일본 에도시대(江戶時代)에 편찬된 불교 도상집인 『불상도휘(佛像圖彙)』(1690)에 처음 등장한다. 이 책에는 헤이안시대 이래 일본 아미타불의 수인으로 가장 많이 선택되어 온 ‘묘관찰지인’, ‘설법인’, ‘내영인’이 각각 상생, 중생, 하생으로 정의되어 있으며, 양 엄지와 맞닿은 손가락을 검지, 중지, 약지로 바꿔가며 상품, 중품, 하품으로 이름 붙여졌다. 결과적으로 상생, 중생, 하생의 삼생과 상품, 중품, 하품의 삼품이 교차하게 되면서 총 9개의 수인(手印)인 ‘아미타구품인’이 만들어진다.
누가, 왜 이와 같은 도상을 만들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불상도휘』 서문에 실린 “이 책에서 추려 모은 것들은 ……”의 구절, 책이 갖는 백과사전적·학술서적인 성격, 그리고 『불상도휘』보다 약 10년 일찍 조성된 토쿄 죠신지(浄真寺)에 있는 구체아미타여래좌상(1664-1680년경)의 선례 등을 보면 아미타구품인은 『불상도휘』의 저자가 홀로 만들어낸 도상일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즉, 이미 잘알려져 있던 도상을 저자가 옮겨 그렸다고 생각된다. 아울러 11-12세기 일본에 서는 ‘구체아미타당’ 혹은 ‘구체아미타불’의 조성이 크게 유행하였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당시의 유행 규모와 달리 9구의 불상을 구분 짓는 도상에는 일정한 기준이 없었다. 이는 에도시대에도 마찬가지였던 듯한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미타구품인의 전형 이외에도 또 다른 유형들이 확인되며, 또한 전형으로 여기는 형식도 『불상도휘』와 죠신지 불상, 단 두 건뿐이다. 우리가 아미타구품인이라 당연시하는 것 역시 적어도 당시에는 구체아미타불 손 모양의 여러 유형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만약 필자의 견해가 맞는다면 아미타구품인은 아주 특별하거나, 혹은 이례적인 도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즉, 예로부터 관습적으로, 또 일정한 기준 없이 조성되어왔던 구체아미타상의 손 모양 중 하나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부터 이 도상을 ‘아미타구품인’이라 확신하고, 또 특별한 것으로 취급하였던 것일까? 물론 무수히 인쇄, 배포된 『불상도휘』가 주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를 기준으로 불교 도상을 정립한 근대기 일본 연구자들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한편 우리나라의 경우는 다소 늦은 1970년대 후반의 연구물에서부터 아미타구품인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매우 빠른 속도로 학계에서 이 용어 및 개념이 확산되었다. 특히 당시 출판된 불교미술 개설서는 아미타구품인의 일반화·대중화를 가속화시켰으며 ‘아미타구품인=아미타불상의 수인’이라는 통념을 만들었다. 그 결과 아미타구품인은 박물관의 유물 설명 및 문화재 해설 등에서 여과 없이 등장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196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일부 연구자들의 논문에서 아미타구품인에 대한 의구심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즉, 이 수인은 후대에 만들어진 인위적인 도상이므로 사찰 안내문, 불교미술 개설서, 문화재 설명문 등에 근거 없이 적혀 있는 것을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결국 아쉽게도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잘못된 개념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오류를 수정하는 과정은 분명 쉽지는 않다. 지금부터라도 이를 어떻게 정정해 나갈지 적극적인 검토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