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35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서울풍경(風景)」이 1930년대 중반 경성(京城)의 도시 이미지와 맺고 있는 관계를 고찰하려는 시도이다. 「서울풍경」은 미술가 청구(靑駒) 이마동(李馬銅, 1906-1980)의 삽화와 문필가인 경안(耿岸) 서항석(徐恒錫, 1900-1985) 및 양산(凉山) 신남철(申南澈, 1907-1958)의 글로 이루어져 연재된 기사이다. 본 연구에서 중점을 둔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서울풍경」이 게재된 1930년대 중반은 경성의 도시 공간과 시각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시기였다. 무엇보다 경성의 도시 공간 자체가 당시 하나의 거대한 구경거리였다. 둘째, 「서울풍경」은 독자를 염두에 둔 신문 삽화의 형태로 연재되었다. 「서울풍경」에는 신문이 발행된 시점에 신문의 독자, 즉 당대인들에게 가장 화제가 된 주제들이 선택되었다. 따라서 본고의 초점은 1930년대 중반 도시와 미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상황에서 신문 삽화의 형태로 연재된 「서울풍경」이 도시 이미지의 한 단면임을 구체적으로 밝히려는 데 있다.
「서울풍경」이 연재된 1930년대 중반 경성의 도시 공간은 볼거리가 넘쳐났다. 한성(漢城)을 상징하는 장소들인 궁궐은 경성의 대표적인 유원지가 되었다. 경성을 상징하는 백화점은 문화의 중심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무엇보다 1934년 조선시가지계획령(朝鮮市街地計劃令)이 경성에 적용되면서 1936년 경성은 그 영역이 확장된 대경성(大京城)으로 탈바꿈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가장 대중적인 매체인 신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주목되는 점은 신문 간의 구독 경쟁이 치열해진 가운데 신문 역시 독자에게 볼거리를 제공해야 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소설 연재는 독자를 유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전략으로 여겨졌다. 또한 소설 삽화는 소설 연재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소설 삽화는 점차 소설만큼 이나 인기를 끌었다. 그 결과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 소설에서 독립된 형태의 신문 삽화가 등장하였다.
「서울풍경」은 이례적인 예로 이마동의 삽화 및 문필가 서항석, 신남철의 글과 함께 이루어져 1935년 6월에서 7월 사이에 약 한 달간 연재되었다. 「서울풍경」이 신문에 게재된 형태를 보면 삽화가 글의 부연(敷衍)이기보다는 삽화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첫 4회는 이마동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5회에서 13회까지는 이마동이 그림을 그리고 서항석과 신남철이 글을 썼다. 마지막 2회에는 이마동의 그림만 실렸다. 삽화 및 글의 특징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작품에서 다루어진 장소들 대부분은 북촌(北村) 일대에 한정되어 있다. 경성역(京城驛)조차도 봉래교(蓬萊橋)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이로 인해 식민 근대 도시 경성을 상징하는 남촌(南村) 일대와 백화점은 배제되었다. 둘째, 근대화된 도시 공간에 대한 인식이 나타났다. 대부분의 삽화에 조각난 형태로 얽혀진 근대식 건물들, 넓고 평평한 도로, 높은 전신주, 거미줄 같이 엮인 전선 등이 나타났다. 셋째, 일부의 장소들은 엽서에 나타난 장소들이지만 경성역을 제외하고는 엽서와는 다르다. 마지막 4회에서 다루어진 동소문(東小門)은 거의 허물어질 듯한 모습이다.
「서울풍경」에서 확인된 장소의 선택 및 배제, 엽서와 같은 시각 매체와의 유사성 등은 도시 이미지의 형성과 닮아있다. 명소 엽서들은 당대인들에게 도시를 대표할 만한 이미지들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서울풍경」은 독자를 염두에 둔 한 신문 삽화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경성으로 전환되면서 도시 공간에서 과거가 된 서울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 과정은 당대인들에게 시각적인 충격을 주었으며 도시 공간에 대한 당대인들의 기억도 연속적으로 이어지기는 어려웠다. 서항석 및 신남철과 교유한 문인들이 경성 대신 서울을 제목으로 쓴 기사들을 통해서도 도시 공간에 대한 인식 및 기억이 확인된다. 이는 「서울풍경」과 내용적인 측면에서 유사성을 보인다. 따라서 「서울풍경」은 1930년대 중반 경성 도시 이미지의 한 단면으로 당대인들이 기억하고자 한 경성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