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창(董其昌, 1555-1636)은 명나라 말기에 활동한 화가이자 서예가이며 회화이론가이다. 그는 남북종론(南北宗論)을 통해 문인화 절대우월론을 제기하였다. 동기창은 문인화를 남종화(南宗畵)로, 직업화가 및 궁정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북종화(北宗畵)로 이분(二分)한 후 그림의 절대적인 기준을 남종화로 확정하였다. 그는 문인화가들의 계보를 설정한 후 이 계보에 속하지 않는 직업화가 및 궁정화가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아울러 그는 상업화된 문인화가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동기창은 이론과 실제 모두에 있어 문인화의 절대 우월론과 문인화의 정수(精髓)가 무엇인지를 제시하였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는 대필화가(代筆畫家)들까지 고용하여 밀려드는 그림 수요에 대응했던 매우 상업적인 화가였다. 즉 겉으로 그는 가장 순수한 문인화가로 자처했지만 실상에 있어서는 지극히 상업적인 화가였던 것이다. 1962년에 발표된 치공(啟功)의 「董其昌書画代笔人考」는 동기창이 어떻게 대필화가를 고용하여 폭주하는 그림 주문에 대응했는가를 밝힌 기념비적인 글이다. 치공은 여러 문헌 자료를 검토하여 동기창의 대필화가로 조좌(趙左, 1570년경-1633년 이후), 승(僧) 가설(珂雪, 17세기 초에 활동), 심사충(沈士充, 대략 1607년-1640년에 주로 활동), 오진(吳振, 17세기 초에 주로 활동), 오역(吳易, 17세기 전반에 활동), 섭유년(葉有年, 1590-1669), 조형(趙泂, 17세기 전반에 활동)을 거론하였다. 동기창의 〈청산백운홍수도(靑山白雲紅樹圖)〉, 〈의양승몰골산도(擬楊昇沒骨山圖)〉는 조좌가 제작한 대표적인 대필화이다. 동기창의 〈의장승요몰골산도(擬張僧繇沒骨山圖)〉와 〈운장우산도(雲藏雨山圖)〉는 심사충이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동기창의 〈호산추색도(湖山秋色圖)〉는 오진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승 가설, 오역, 섭유년, 조형도 대필화가로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전세(傳世) 작품이 거의 없어 이들이 그린 대필화는 현재 확인하기 어렵다. 동기창이 대필화가들을 어떻게 고용했으며 어느 정도의 윤필료(潤筆料)를 지급했는지는 진계유가 심사충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진계유는 심사충에게 종이 한 폭과 은(銀) 삼성(三星, 0.3량)을 보내 동기창을 위한 대필화를 그리도록 부탁했다. 그는 심사충에게 단 하루의 시간을 주고 빨리 대필화를 완성하도록 했으며 동기창이 관서를 할 예정이니 그림에 낙관은 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였다. 동기창이 이들에게 준 윤필료는 거의 착취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결국 동기창은 이들을 활용해 엄청난 돈을 벌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중년 이후 사망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대필화가들을 고용해 그림을 제작한 것은 경제적 이윤 추구가 가장 큰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심지어 희시(姬侍, 첩)들을 활용해 다량의 대필화를 그림 고객들에게 팔았다. 동기창은 평생을 철저히 상업적인 화가로 살았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