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응교가(朴應敎歌)〉는 숙종조에 응교(應敎)를 지낸 박태보(朴泰輔, 1654~1689)의 죽음을 소재로 삼은 가사 작품이다. 박태보는 1689년에 인현왕후(仁顯王后) 폐출을 반대하여 숙종의 친국을 모질게 받고서 진도로 유배를 가던 도중에 노량진 사육신 사당 앞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당대 권력의 정점인 임금을 옳은 길로 인도하려고 서슴없이 직간하다가 모진 형벌을 받고 죽음에 이른 박태보는 충직한 신하의 한 전형으로 회자되었다. 이로써 “박태보전”으로 통칭되는 소설이 18~19세기에 유행하기에 이른다. 〈박응교가〉의 산출은 “박태보전”의 이러한 유행을 배경으로 한다. 본고에서는 서사 양식의 유행 속에서 동일 사건을 소재로 삼아 장르와 양식이 다른, 가사를 창작하게 된 현상에 주목해 19세기 가사 향유의 한 국면을 살펴보았다.
〈박응교가〉는 “박태보전”의 유행 속에서 박태보 서사를 활용한 작품이므로 2장에서 “박태보전”의 유행과 인기를 확인하면서 ‘박태보 서사’와 〈박응교가〉의 관계를 개괄적으로 검토했다. 그 결과 〈박응교가〉가 박태보 서사를 다룬 “박태보전”, “인현왕후전”이 폭넓게 읽히거나 그러한 유행 속에서 형성된 이야기가 성행하는 환경에서 필사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창작되었다는 점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3장에서는 박태보 서사의 활용과 진술 특징이라는 두 층위에서 작품을 분석했다. 1절에서 분석된 서사 활용 특징은 박태보 일인의 영웅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건의 일부를 변개하거나 심지어 허구적인 내용으로 대체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박응교가〉의 창작과 향유 환경에서 서사의 사실성과 그 보고가 크게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2절에서 밝힌 진술 특징은 상황이나 인물에 대한 감정을 표출하고 그에 대한 태도를 드러내기 위해 화자의 논평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박응교가〉가 박태보 사건을 마주하면서 발생한 격정적 감정, 곧 세계보다는 내면에서 일어난 감정을 표출하고자 하는 욕구에 대한 반응의 결과물이라는 의미이다.
4장에서는 3장의 분석 결과를 토대로 삼아 〈박응교가〉의 가사문학사적 의미를 조명하면서 19세기에 일어난 가사 문학 향유의 한 국면을 살펴보았다. 논의의 결과, 〈박응교가〉는 19세기 전반에, 특정 사건에 대한 감상을 담아낼 국문 표현 양식의 요구에 반응한 결과로 산출된 작품으로 드러났다. 19세기에 이르러 국문을 주요 표현 수단으로 삼는 신분이나 계층이 문학 작품 창작에 대거 합류하면서 발생한 다채로운 표현 욕구를 가사가 신축성 있게 감당해 나간 국면의 실상이 〈박응교가〉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