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메이지(明治) 전기 일본에서 양학(洋學)의 도입과 융성이 한학(漢學)의 존재 의의와 어떠한 상관관계에 있었는지, 당대 최고의 유학자이자 양학자이었던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 1832-1891)의 논의를 중심으로 고찰한다.
도쿠가와 말기부터 시작된 양학 교육은 메이지 유신 이후 기존의 한학 중심의 교육 제도를 그 근간에서부터 바꾸어 버렸다. 학문의 주류는 빠르게 양학으로 바뀌어 갔고, 사회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양학을 배워야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한학의 존재의의가 소멸된 것은 아니다. 서양 문명의 도입이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되는 번역서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한자로 된 번역어가 급증했고, 공식 문서상의 문체가 소로(候)문에서 한문 훈독체(訓讀體)로 바뀌게 되면서 한학적 소양에 대한 새로운 각도에서의 수요가 발생하였다. 나카무라에 따르면 한학의 기본 소양 없이 언론이나 정치, 학문 영역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는 어려웠다. 그는 일정 수준 이상의 양학 학습을 위해서도 한학의 기초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이처럼 사회의 변화를 직시하면서도 한학의 유용성을 주장한 나카무라의 주장은, 1880년대 후반 이후 그의 후속 세대 한학 혹은 중국에 관한 지식인들의 논의와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이 글에서는 도쿠가와 시대의 마지막 유학자 세대에 속한 나카무라가 전개한 서양 이해의 논리, 그리고 이와 표리를 이루는 한학의 유효성에 대한 확신의 이유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