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를 지역의 특장으로 삼았던 영남기생은 어람창극의 자부심을 바탕으로 1910년대 전문구극집단과의 연대 속에서 1910년대 중‧후반 본격적인 창극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남수의 연기는 ‘기생의 조’를 강요하던 식민지 남성권력의 시야에서 기생의 추태이자 용납할 수 없는 일탈로 지탄받았으나, 창극 활동을 통해 ‘기생’이 아닌 1910년대 대표적인 창극계의 ‘기생-배우’로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기생조직의 창극 공연활동에서 시도된 창작 창극과 진일보한 무대표현은 1910년대 중‧후반 식민지 남성권력에 의해 허용된 섹슈얼리티를 넘어 다양한 자기표현을 시도하던 ‘기생-배우’ 출현의 양상을 보여주는데, 이는 이후 여배우와 여성 대중예술인의 물머리가 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