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죄인’을 자처하며 지방에 ‘은둔’하던 유림이 1920년대 초 경성에 나타났다. 그들은 경성에서 대규모 회의를 열고 전국적인 유림단체를 조직하였으며 과격한 발언과 행동을 불사해 종종 신문 기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들은 왜 급변했던 것일까? 이를 3.1운동 이후 유림의 ‘반성’과 총독부 문화정치의 제한적 ‘자유’라는 틀에서 벗어나 ‘혁명’과 ‘반동’이라는 시각에서 살펴보았다.
우선, 1920년대 초 유교 비판의 초점이 이전과 비교해 어떻게 달랐는지 살펴보았다. 이어, 신지식인층을 민족주의 세력과 청년‧노동‧사회주의 세력으로 나누고, 1920년대 초 이들이 각기 특정 매체와 사건을 계기로 유교를 신랄하게 비판한 사실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신지식인층의 유교 비판에 대해 유림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살펴보았다.
1920년대 초 유교 비판은 전 시기와 달리 비판의 대상이 실용성의 차원을 넘어 유교의 장점으로 인식되어온 도덕과 윤리의 차원으로 확대되었다는 데에 있다. 신지식인층은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을 막론하고 유교를 신랄히 비판하였고, 이런 분위기는 사회단체와 대중매체를 통해 식민지 조선의 대중에게 확산되었다. 유림은 유림총부라는 지도기관을 설립하여 위기를 타개하고자 했다. 즉, 1920년대 초 유림의 외부활동 재개는 1910년대부터 이어진 ‘혁명’과 ‘개조’의 분위기에 대한 ‘반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