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1920년대 전반 한국 사회주의 운동과 사상의 세계사적 보편성과 특수성을 해명하기 위해, 초기 조선물산장려운동의 주요 주도세력인 국내상해파와 조선청년회연합회의 활동과 물산장려운동론 및 국내상해파 세력의 일원인 나경석의 주장을 소재로 하여, 이를 영국 페이비언 및 독일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의 주장과 비교하여 살펴보려는 것이다. 평양에서 시작된 물산장려운동이 전국적 운동으로 확산된 것은 청년회연합회가 물산장려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부터였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국내상해파 주류세력들이 있었다. 초기 물산장려운동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1920년대 전반 조선 사회주의 운동과 민족주의 운동의 접점을 인정하고, 사회주의 운동 특정 분파의 운동 논리의 측면에서 초기 물산장려운동론을 재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산장려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국내상해파 계열 인물들은 근대 자유주의적 사회론과 국가론에 대한 비판 속에서 현대 자본주의 제도의 개편과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전망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단기적으로는 생산력 증식을 위한 기술 습득, 생산과 소비를 위한 소비조합과 생산조합의 확대, 조선인 물품 애용 등을 제안하였다. 그들은 계급투쟁을 앞세우는 여타 사회주의정파를 비판하면서,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하면서도 전형적인 생산력 중심적, 단계론적 혁명론 인식을 보였다.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민족운동과 사상은 세계성과 동시성을 갖고 있었다. 일본 유학의 경험을 대개 갖고 있는 조선의 민족엘리트들은 일본 본국과 거의 차이 없이 서구 사상을 수용하였고, 서구와 일본 정치변동에 민감하였다. 페이비언과 영국노동당, 그리고 독일의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 등은 사회 이행에 있어 국가의 역할을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 주요하게 보았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많은 시간과 점진적인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치는 것을 인식하여, 점진적 개혁을 통한 사회변화, 보통선거제 도입과 선거권의 확대, 의회 권한 확대 등을 주장했다. 사회혁명은 정치혁명을 전제로 하며, 근대적 생산력이 불충분하게 발달된 곳에서는 사회주의의 도입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물산장려운동 논쟁의 한축을 담당하던 나경석은 생산력이 충분히 발달되지 못한 사회에는 정치혁명은 일어날 수 있어도, 사회혁명은 출현하지 못한다고 보았고, 러시아혁명에 대해 유보적 인식을 갖고 있었다. 또한 사회 이행에서 생산력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무산계급의 섣부른 혁명주장을 경계하였다. 당시 물산장려운동 논쟁에 대한 동아일보의 사설은 국내상해파의 입장을 반영하여 나경석의 주장과 거의 비슷한 논조를 보였다. 이들 주장은 서구에서 주요하게 논의되었던 사회주의혁명의 전제로서 생산력의 문제, 자본주의화 문제들을 조선적 상황에 맞게 재해석한 것이었으며, 계급문제와 민족문제, 혁명 단계 설정 문제 등을 제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