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천태산인 김태준의 명륜학원 재직기 및 한문학적 전통의 실천에 주목하여, 기존 연구사의 구도에서는 명확하게 포착되기 어려웠던 ‘한학자’로서의 새로운 면모들을 밝혀낸다. 성암과 천태산인 등의 필명의 의미를 전통학술의 맥락에서 설명하였다. 김태준의 명륜학원 임용에 있어 무정 정만조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도쿄제국대학 교수진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한학자’들과의 관계, 그리고 한시 수창이 중요한 매개를 담당했음이 드러난다. 성균관의 제례기능만을 계승했던 경학원은 부설 명륜학원의 설치로 교육기능을 부분적으로 회복하게 되며, 그것은 조선유림들의 지속적인 요구, 식민지 정부의 유학 이용의 필요성, 경성제국대학이라는 근대 아카데미의 설립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경성제대 졸업직후 곧바로 명륜학원의 강사로 임용된 김태준은 조선총독부 직원이라는 안정적인 신분과, 비교적 적은 교수부담으로 연구활동에 유리한 요건들을 확보하게 된다. 김태준은 명륜학원 재직기 한시 수창, 고전적(古典籍)의 수집과 필사 등 한문학적 전통의 실천을 이어나가며, 그것을 자신들의 제자들에게 전수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김태준이 1930년대 이미 낙하생(洛下生)을 이학규로 낙점할 수 있었던 것은 지속적인 한문학 전통 실천활동의 수확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시체제기의 격화와 더불어 평화로운 명륜학원의 일상에 균열이 찾아오게 된다. 명륜학원의 동료들이 대부분 적극적인 체제협력에 나서던 시점, 김태준은 경성꼼그룹 참여를 통해 항일을 선택한다. 그의 선택은 예과시절부터 보여주었던 강렬한 민족의식이 예고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태준은 경성꼼그룹의 지도부로부터 의혹의 눈초리를 받으며 연락책이나, 확실한 신분에 기댄 은신처 확보 등의 제한적 역할만을 수행하다가 체포되고 만다. 본고에서 밝혀진 명륜학원 강사이자 한문학 전통의 실천자로서의 면모는 특히 「연안행」을 중심으로 구축된 기존의 ‘혁명가’ 이미지를 재고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김태준이라는 인물과 그의 학술활동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한·중·일을 아우르는 동아시아 역내의 장기역사적 맥락, 그리고 전통의 ‘외부’에 위치한 비판자가 아닌 내부와 외부를 아우르는 시각을 확보한 비판적 계승자라는 새로운 관점의 필요성이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