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역대 여러 시인들의 눈에 비친 전주의 모습을 조망함으로써, 한 고을의 모습이 그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고을의 변화를 이들이 어떻게 감지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시각이 왜 변하고 있었으며 그 동인은 무엇인지 등을 살피고자 작성되었다.
우선 고려와 조선시대 문인들에게, 전주는 完山府라는 명칭으로 친숙했고 특히 전주객사의 扁額 ‘豐沛之館’의 ‘灃沛’라는 지명으로 더 불리게 되었다. 豐沛館은 詠物의 대상이 되었고, 그것을 읊은 시들은 대개 王都로서의 繁華와 衰退의 공간으로 인식되어 작품에 형상화 되었다. 그중 李承召의 「送全州府尹」이라든지, 徐居正의 「慶基殿」, 張維의 「完山府」, 盧思愼의 「濟南亭」 등의 작품들은 중국의 도성, 왕, 풍속 등에 견주며 전주 지방을 가장 신성한 지역으로 칭송하고 있었다. 즉 당나라를 창건했던 李世民의 고향인 隴西를 전주에 비견하는가 하면, 漢나라 高祖 劉邦의 고을 豐邑 沛縣을 전주와 대등한 위치에 놓기도 하고, 심지어 周나라 先祖 公劉가 도읍을 세운 곳인 豳 땅에까지 소급하며 전주를 왕도로서 찬송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물에는 消長이 있듯이 전주지역 또한 衰落이 있었다. 壬・丙 兩亂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후로도 꾸준히 쇠퇴의 길을 걸은 것도 사실이다. 위급한 상황에서 지역민을 보호하는 기능을 상실했음은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地利보다 人和를 하지 못한 政事가 한몫을 했다. 심지어 ‘버린 땅’이라는 불명예를 안기도 한 것을 趙顯命의 「豊南門樓」와 「明見樓記」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비옥하고 풍족한 자연환경으로 인해 풍류객들의 자취가 끊이지 않았고, 風流와 靜寂의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三宜堂 金氏의 「過完山南川橋」, 梅泉 黃玹의 「全州」, 睡隱 洪錫輔의 「寒碧樓」 등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