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末松保和라는 식민주의 역사학자의 學術生涯史를 통해 식민주의 역사학이란 무엇이고 한국사 학계에서 그에 대한 태도에 엇박자가 난 이유를 찾아보는 데 목적이 있다.
末松는 폭넓은 조선사 연구 뿐 아니라 방대한 분량의 자료집을 간행하고 다양한 목록을 만들었으며, 번역과 서평까지 게을리 하지 않은 매우 성실하고 역량 있는 역사학자였다. 그의 왕성한 연구 활동은 식민지에 파견된 제국의 관학자라는 우월한 특권적 지위로도 보장되었다. 하지만 식민주의 이데올로그로서의 활동은 일본이 패전하며 식민지를 상실함에 따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귀국 후에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한 일본의 행위를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역사이념을 생산하지 않았다. 대신에 전근대 조선사에 관한 연구와 그 밖의 다양한 학술 활동을 왕성하게 벌이는 한편에서, 자신의 연구를 심화하는 연구서를 간행하였다. 그 중 『任那興亡史』(1949)가 가장 대표적인 업적이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식민주의 역사이데올로그로 활동하던 末松에게 任那는 본국의 朝廷과 이해를 함께하는 일본의 한 지방이자 內地가 延長된 곳이었다. 총동원체제 시기에 임나는 神代를 관통한 사상원리의 역사적 근거를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일본이 패전한 후 귀국한 末松는 실증을 포장하는 이러한 시대 인식을 전혀 내세우지 않으면서 더 종합적이고 精緻한 實證으로 임나사를 다듬는 한편, 임나와 韓族의 지배․피지배 관계를 중앙과 지방의 관계에서 植民과 被植民 關係로 바꾸어 바라보았다. 그의 任那史 연구는 일본의 학술공간에서 末松란 학자의 존재감을 보장한 성과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실증이란 이름으로 한국사의 예속성을 드러낸 결과물이었다. 末松는 50년대 후반을 지나며 滿鮮史體系의 흔적을 벗어났지만, 자신의 실증에 오류가 있다고 보지 않았으므로 임나에 관한 생각을 죽을 때까지 바꾸지 않았다. 실증 연구를 통해 과거의 인식을 바꾸면서 한일간의 과거를 청산하자는 입장이었던 그로서는 당연한 태도였다.
한국과 일본의 후학들은 이러한 변화에 주목하지 않았다. 無知했거나 回避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사 학계는 실증을 통한 식민주의 역사학의 해명이란 측면에만 몰두하고 존재의 태도와 조건에 주목하지 않았다. 때문에 한국사 학계는 실증 대 실증으로 식민주의 역사학을 비판하고 극복하는 방안을 찾을수록 실증에 가려진 또 다른 숨은 진실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었다. 오히려 학문의 고립성을 정당화해주고 제국의 이해를 반영하는 식민주의 역사학이 얼마나 뛰어난 학문인가를 증명해 주는 ‘위대한 역설’에 빠지는 경향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