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혜왕은 다수의 저포를 민간으로부터 확보한 후 삼현신궁의 채녀들로 하여금 특수가공케 했는데, 그렇게 해서 생산된 직물이 바로 14세기초 충선왕이 기획한 ‘직문저포’다. ‘직문’을 거쳤던 바 이미 상품가치가 강화된 제품이었지만, ‘직금(織金)’과 ‘교직(交織)’ 기법이 추가로 적용되면서 그 상품성은 물론 중국제품과의 이질성도 증강됐음이 확인된다. 충혜왕은 이런 직문저포를 중국에 수출했고 그 가격경쟁력이 낮지도 않았으며, 원제국시기 중국내 저포상품의 생산 및 유통이 송․명대에 비해 적었던 점 및 그간 중국에 유입되던 동남아시아산 인피섬유의 양 또한 1330년대 감소한 점 등이 고려 직문저포가 중국시장 내에서 적지 않은 경쟁력을 발휘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역으로의 수출 역시, 서역산 인피섬유 중 ‘저’의 비중이 현저히 적어 고려 직문저포와 서역산 동종직물 간 경쟁이 약했던 데다 ‘일칸국’ 직물 소비자들이 이미 동북아시아 직물전통에 상당정도 익숙해져 있었던 점이 고려의 직문저포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