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건국과정에서 중요한 이슈 가운데 하나가 역사적 정통성에 관한논쟁이다. 우익은 3·1운동과 임시정부에, 좌익은 일제 강점기의 지하운동에 각각 역사적 정통성을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1946년 3·1절 기념행사는 우익 주도의 기미독립선언전국준비위원회와좌익주도의 3·1기념 전국준비위원회로 나뉘어서 전자는 민주의원의 후원으로 서울운동장에서, 후자는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후원으로 남산공원에서 열렸다. 우익은 종교단체, 학생, 청년, 부녀, 동 대표 등의 조직을 동원하여 약 10만에서 20만 명을 동원하였으나 좌익은 언론사와 예술계의 협조에도 불구하고 1만 5천명 밖에 동원하지 못했다. 이 논쟁은 단지 대중동원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우익은 3·1운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이승만과 김구는 이런 정통성을 계승한다고주장하였다. 좌익은 3·1운동은 민족대표들의 리더쉽의 부재로 실패로 끝났고, 노동자와 농민이 진정한 민족대표라고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