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임진왜란기(壬辰倭亂期, 1592-1598) 발생한 조선피로인(朝鮮被虜人)의 일본 사츠마번(薩摩藩) 나에시로가와(苗代川) 정착과정을 관련 1차 사료를 중심으로 분석하려는 것이다. 정착과정에 관한 필자의 선행 연구에 이어 정착 이후의 조선피로인 후예들의 행적과 그 의의에 초점을 맞추었다. 나에시로가와 조선인들은 정착이 완료된 이후 선조들의 전통과 문화를 유지하면서 도공 뿐 아니라 농민, 역인(役人), 그리고 조선통사(朝鮮通詞)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구체적으로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나에시로가와 사회는 번 차원의 다양한 제도적 지원에 의거 행정조직체계가 완료되는 한편 조선인 혈통보호의 법적 장치가 마련됨으로써 안정적 발전의 기틀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급속한 인구증가에 따라 1704년에서 1705년 사이에 진행된 카사노하라(笠ノ原)로의 분촌(分寸)은 조선인 거주지역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나에시로가와 성장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나에시로가와는 분촌 이후 인구의 증가와 경제적 안정이 지속되는 등 번영을 거듭했다. 1719년 번의 직접 지배에서 다시 이쥬인(伊集院) 지토(地頭) 지배로 환원되기는 하였으나 나에시로가와에 대한 번 차원의 제도적 지원과 관심은 이후에도 확고히 유지되었다. 나에시로가와 번영의 또 다른 측면은 조선통사제도의 구축과 발전이었다. 조선통사들은 역인직을 겸임하면서 조선어의 유지라는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19세기 후반까지 표착 조선선박과 조선인 처리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나에시로가와 정착 조선피로인 후예들의 희생과 노력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과 일제의 식민지화라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급격한 정치적 변동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그 결과 나에시로가와의 조선인들은 300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조선의 피를 가진 일본인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에시로가와 정착 조선인들은 불행한 근세 한-일관계사의 상징적 존재로서 그리고 자국민 보호를 위한 국가와 정부의 역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