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그레이트 게임과 청일전쟁의 상호작동성을 모색해보고, 이를 전제로 청일전쟁기의 러시아의 조선정책을 조러관계 및 한반도를 둘러싼 다계적인 국계관계의 변화를 재고찰해 본 것이다. 이를 위해 시간적 범주를 앞으로는 1884년의 조러통상조약과 거문도사건까지 소급하고, 뒤로는 삼국간섭이후 한반도를 중심한 러일교섭(1896-1898)에 까지 확대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를 청일전쟁이전시기(1884년-1894년 6월초), 개전외교시기(1894년 6월초-1894년 7월), 전쟁강화 및 삼국간섭시기(1894년 7월-1895년 4월말), 그리고 전쟁이후시기(1895년 10월-1898년 4월)로 구분하여, 각 시기에의 러시아의 조선정책을 살펴보았다.
청일전쟁기의 러시아의 조선정책은 삼국간섭을 계기로 소극적에서 적극적으로, 또는 기다리며 관망하는 자세에서 주도적 자세로 전환되고 있다. 하지만 큰 틀에 있어서는 지속적이고 일관된 노선을 견지하고 있는 바, 그것은 조선의 자주와 독립을 전제로 한 현상유지책을 기조로 하고 있었다. 이같은 러시아의 정책적 연속성은 거문도사건이후 결정된 러시아의 조선정책, 청일전쟁 뿐 만 아니라 러일전쟁의 그것에도 일관되게 지속되고 있었다. 이같은 역사적 사실은 청일 개전 원인의 시발점을 1880년대에 까지 소급해보면 더욱 분명해 지며, 일본의 주권선, 이익선 구상 뿐 만 아니라, 1880년대 거문도사건을 계기로 한반도문제가 국제화된 과정과도 깊게 연루되어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청일전쟁이 한반도 문제의 국제화의 산물이라는 역사담론까지도 가능케 한다. 이와 같은 역사담론은 기존 연구에서 통설화된 러시아의 극동정책에 있어서 한반도는 만주의 방어를 위한 방파제 또는 전초기지적 성격 밖에 띄지 못하고 있었다고 하는 논거를 재고케 해 준다. 왜냐하면 영러의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한반도는 1884년의 거문도사건, 1894년의 청일전쟁에서 뿐 만 아니라 1904년 러일전쟁에서도 간과할 수 없이 확보해야하는 중요한 러시아의 동아시아 전략거점이었음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