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 부처의 진짜 유골이라 믿어지는 진신사리는 부처와 동일한 신격을 지닌 존재로서, 불교계에서 널리 존숭되었다. 진신사리 신앙은 석가모니의 열반 직후에 세워진 근본팔탑의 건립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일찍부터 국왕의 정치적 위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발달하였다. 특히 기원전 3세기 인도의 아쇼카왕에 의해서 세워진 팔만사천탑은 국왕의 진신사리 공양이 가지는 정치적 함의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예이다. 이후 아쇼카왕의 선례를 따라 중앙아시아와 스리랑카, 동아시아 등의 여러 불교 국가에서는 국왕에 의한 진신사리 공양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의례와 당시 만들어진 조형물들은 후원자인 국왕의 정치적 위상을 높여주는 선전물로서 기능하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아쇼카왕의 전설이 5세기경부터 남조에 전해지면서, 양무제나 진무제와 같은 국왕의 진신사리 공양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양무제의 진신사리 공양은 무력을 통해 집권한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동시대의 백제와 신라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한편 남북조를 통일한 수문제는 아쇼카왕의 팔만사천탑 고사를 본받아 인수연간에 100여개의 진신사리를 전국 각지에 보내어 각각 탑을 세웠다. 수문제의 이러한 사리신앙은 순수하게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통일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고대 국왕들에게 진신사리의 호지와 공양은 자신의 聖德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고 민심을 모으기 위하여 진신사리 공양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위덕왕과 신라의 선덕여왕이 이러한 정치적 목적에서의 진신사리 공양과 전륜성왕 사상을 받아들였다. 이와 같은 진신사리 공양 과정에서는 국왕의 후원으로 그를 위한 선전용, 혹은 위엄 과시용으로 탑이나 사리기와 같은 새롭고 독특한 조형물들을 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존하는 백제의 사리장엄구나 신라 황룡사목탑지 출토품 등은 그러한 영향 관계를 보여주는 고고학적, 미술사학적 유물로서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