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중국 南北朝時代부터 唐代까지의 문헌에 나타나는 阿育王塔 관계 기록을 검토한 것이다. 중국의 아육왕탑은 기원전 3세기경 인도의 실제 제왕인 아쇼카왕이 부처의 眞身舍利를 봉만하기 위해 세웠다는 전설을 가진 탑이지만, 실제 건립시기는 중국의 불교전래 이후로 추정된다.
중국에서 아육왕탑의 명성이 높아지는 시기는 구법승들의 인도 방문 이후부터이다. 5세기 전반까지의 중국 문헌에서는 西域의 아육왕탑에 대해서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중국내의 아육왕탑에 대해서는 5세기 중엽경의 『高僧傳』과 『魏書』 「釋老志」 등의 기록에서 가장 먼저 찾아 볼 수 있으며, 이 시기에는 모두 6개소 정도에 불과하다. 唐代가 되면 중국의 아육왕탑의 수는 크게 늘어나 20여개소를 훨씬 넘게 된다. 唐代 중국 아육왕탑에 대해서는 주로 승려 道宣의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道宣의 『廣弘明集』, 『集神州三寶感通錄』, 『道宣律師感通錄』 등에 기록된 아육왕탑은 모두 28기에 달하는데, 각 기록별로 상이한 점이 있다. 668년 道世가 서술한 『法苑珠林』에는 모두 24개소의 아육왕탑이 기록되어 있는데, 道世의 기록은 道宣의 기록을 섞어서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일부 혼동과 오류가 있다.
중국의 아육왕탑 중에서 비교적 중요한 곳은 梁武帝가 공양했던 南京長于寺塔과 會稽 무縣塔이다. 이 두 탑은 南北朝時代부터 唐代까지 중국의 가장 대표적인 아육왕탑이자 중국의 聖地로서 명성을 날렸다. 唐代에는 則天武后가 공양한 法門寺塔이 가장 유명한 아육왕탑으로 이름높았다. 이들 중국의 대표적인 아육왕탑들은 주로 황제들의 공양과 후원을 받으면서 이름이 높아졌으며, 여러 황제들은 아육왕탑의 공양을 통하여 자신을 불교적 聖王으로 지칭하였다. 그러므로 중국 황실의 아육왕탑 공양은 불교 신앙적 측면에서도 중요하지만, 황제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는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