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부터 1910년 8월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까지 활동했던 민간의 신흥 정치세력, 그 가운데서도 민족적 자주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근대화를 추구했던 세력들의 민족운동론을 분석했다. 이 시기는 1897년 10월 수립돼 1910년 8월까지 계속된 대한제국의 후기에 해당한다.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군이 한국에 주둔한 시점을 전후하여 근본적으로 성격이 달라진다. 전기가 동북아 지역에서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균형을 배경으로 대한제국이 비교적 자율적으로 국정을 운영했던 데 비해 후기는 일본군과 뒤이어 설치된 통감부의 간섭을 받으며 국정 운영의 자율성이 크게 손상됐다.
한국근현대사에서 중요한 변곡점의 하나인 대한제국 후기는 주로 '일본의 침략'과 '한민족의 저항'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해왔다. 이런 관점에서면 한쪽에는 한국을 침략하는 일본이 있고, 맞은편에는 그에 맞서는 조선왕조(이 시기에는 대한제국)의 왕실을 비롯한 지배세력과 의병이 위치하게 된다. 민간의 정치·사회 운동에 대해서도 주로 저항의 측면에 주목한다. 하지만 이 시기를 '침략과 저항'이라는 홑눈[단안·單眼]으로만 바라보면 대외적 측면 못지않게 중요했던 대내적 측면을 이해할 수 없다.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국내외 정세 속에서 대응방안의 모색에 노심초사했던 신흥 정치세력을 조명하려면 대외적 측면뿐 아니라 대내적 측면에도 주목하는 겹눈[복안·複眼]이 필요하다. 이에 본 연구는 대내적 '개혁'에 초점을 맞추어, 대한제국 후기가 '국망(國亡)'으로 가는 암울한 시기만이 아니라 '신국가 건설'의 출발점이기도 했음을 드러내려고 했다. 이 같은 접근은 또 1910년 이후 국내외에서 펼쳐진 민족운동이 '독립'과 '신국가 건설'을 함께 지향한 것이었으며, 그 방향을 놓고 갈등·경쟁했음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1876년 개항 이후의 조선 사회는 신분제와 과거제로 대표되는 통치체제가 흔들리면서 향반·서얼·중인, 평안도·함경도 출신 등 정치적으로 소외됐던 세력이 부상했다. 한인의 거주공간도 한반도를 넘어서 연해주·만주와 하와이·미국 서부 등으로 확대됐다. 이런 추세는 러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의 침략으로 대한제국의 국가권력이 무력화되면서 가속화됐다. 새로운 정치·사회 환경을 배경으로 신흥 정치세력들이 등장했고, 그들은 정국의 급변에 대한 대응방안과 방향을 놓고 분화·변화되어 갔다.
대한제국 후기에 '개혁'을 위한 민족운동론을 제시하면서 한국 사회를 장악하려던 신흥 정치세력에는 세 유형이 있었다. 첫 번째는 한민족을 서구처럼 정치적 주권을 행사하는 '국민'으로 형성하려는 것으로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들이 주도했다. 두 번째는 한국을 당시 일본과 같은 '문명부강'한 사회로 만들려는 것으로 국내의 광범위한 계몽운동 세력이 여기 포함됐다. 세 번째는 대한제국이 1907년 고종의 강제양위 이후 사실상 멸망한 상황에서 한민족의 문화적 유산인 '국수(國粹)'를 보전함으로써 정신상 국가를 유지하려는 것으로 개신유학자에서 전향한 일부 지식인들이 여기에 속했다.
이 가운데 당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했던 것은 두 번째 유형이었다. 그런데 그중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일진회는 문명부강을 절대화해서 국가의 독립이나 민족적 자주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규모가 컸던 대한협회는 문명부강과 함께 국가의 독립이나 민족적 자주성에도 어느 정도 중요성을 부여했지만 구성이 다양해서 내부적인 취약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 결과로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 이후 대부분의 유력 인사들이 식민지 조선 통치구조에 흡수돼 순응하거나 활동을 중단했다. 이 유형에서 내부적인 결속력을 지니면서 민족적 자주성을 유지한 가운데 문명부강을 추진한 그룹은 천도교 지도부였다.
첫 번째 유형을 대표하는 재미 한인은 국외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역할을 했다. 그들이 만든 공립협회와 국민회를 이끌었던 안창호 등은 서북 출신의 평민이었다. 그들은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지만 한학과 유학에 대한 소양이 깊지는 않았다. 따라서 유교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왕조의 문화적·사상적 전통에 대한 애착이 덜했다.
재미 한인의 상당수는 한국에 있을 때 개신교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독립협회·만민공동회 활동을 통해 근대적 대중운동의 역동성을 맛본 안창호 등은 미국으로 건너가 살면서 한국을 미국처럼 문명 부강한 나라로 만들고 자신들이 그것을 주도해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지니게 됐다. 일본의 통치 영역에서 벗어나 있던 그들은 일본에 끌려가는 방식이 아니라 한민족의 힘으로 근대국가를 세우기 원했다.
러일전쟁 발발 이후 점차 형성되기 시작된 재미 한인의 민족운동론은 '문명부강론'에서 시작해 '계급타파론', '국민주권론과 국민국가론'을 거쳐서 '공화정'까지 단계적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멸망 이후에는 재미 한인이 중심이 되어 무형정부로서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설립됐다. 대한제국 후기에 재미 한인이 제시한 '국민국가론'은 당시는 물론 그 이후에도 국내를 포함한 전 세계의 한인공동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두 번째 유형 가운데 민족적 자주성을 유지하려고 했던 천도교 지도부는 중간 신분 출신이었다. 그들은 신분적 불안정성과 정치적 수난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강한 현실주의를 지녔다. 그들은 새로운 사상이나 정치 이념을 모색하고 실천하기보다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그 속에서 권력에 참여하는 길을 선택했다.
동학의 최고 지도자 손병희는 일본에 망명하면서 문명개화론을 수용했고, 망명 개화파를 동학 교단에 영입했다. 일본에서 국내의 정치 상황을 주시하면서 정국의 변화를 모색하던 그들은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동학의 합법화와 민회 설립을 요구한 데 이어 국내에 들어와 국민계몽 활동을 전개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정부의 탄압을 피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일진회와 손잡고 일본의 그늘 아래 들어갔다. 하지만 일진회의 지나친 친일화가 강한 반발을 초래하고 일진회가 동학의 지방 조직을 잠식하자 상당한 타격을 무릅쓰고 일진회와 단절했다. 이후 독자적으로 활동할 정도의 힘은 갖지 못한 그들은 국민정당을 표방하는 대한협회에 합류하여 권력 참여를 모색하는 길을 선택했다.
천도교 지도부는 한국이 일본의 보호 아래서 점진적으로 부강발전을 이룩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국권이 상당한 손상을 입는 통감부 체제를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들은 일본의 한국병합에는 반대하고 한국이 독자적으로 발전할 것을 주장했다. 그들의 '부강발전론'은 민족과 문명부강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 유형을 대표하는 '국수보전론(國粹保全論)'은 느슨하지만 가장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국수보전론을 대표하는 신채호·주시경·나철은 향반 출신으로 개신유학 전통에서 출발한 인물이다. 그들은 복고적이거나 퇴영적인 국수주의자는 아니었고, 서구 근대문명의 도입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일본식 근대나 서구식 근대에 친숙하지 않았던 그들은 한민족의 전통과 고유성을 근대적이고 문명적인 것으로 새롭게 인식·재편하려고 했다.
문명부강론에 경도되고 외교활동에 몰두하던 이들은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유학이 현실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무력하다는 것을 깨닫고 한국의 고유전통인 '국수(國粹)'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교육·실업 논설을 발표하면서 문명부강을 역설하던 신채호는 1908년 무렵부터 '정신상 국가'와 그 구심으로서의 '국수'를 제시했다. 그는 한민족이 역사적으로 중국과 다르게 형성된 과정에 주목하고, 그 상징으로 '단군'을 강조했다. 문명부강을 위해서 한문이 아니라 국문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던 주시경은 1906년부터 일본의 침략을 경계하며 국어 숭상을 강조했다. 그는 1908년에 이르러 국가와 민족의 존망을 좌우하는 국성(國性)과 그 상징으로서의 단군에 주목했다.
국수보전론은 민족의 기원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고 그것은 단군으로 귀결됐다. 1909년 2월 나인영(나철)은 모화(慕華)·사대(事大) 사상이 민족의식을 가려서 국망(國亡)에 이르게 됐다며 우리 민족의 고유종교인 신교(神敎)의 '중광(重光)'을 선포했다. '국망도존(國亡道存)'의 구호를 앞세운 단군교는 급속도로 지식인과 청년 우국지사 사이에 확산됐다. 국수보전론을 선도하던 신채호도 단군교에 영향을 받아 한국의 선교(仙敎)를 연구하면서 인식을 심화시켜갔다. 김두봉을 비롯한 주시경의 제자들도 대종교의 문을 두드렸다.
대한제국 후기에 민족적 자주성을 유지하면서 근대화를 지향하는 신흥정치세력들이 제기한 민족운동론은 당시는 물론 한국이 일본에 강제병합된 뒤에도 한민족의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들 신흥 정치세력은 1910년대 이후 국내외에서 민족운동·독립운동 단체를 만들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민족운동론을 발전시켜갔다. 그들의 민족운동과 민족운동론은 1919년 거족적으로 일어난 3·1운동으로 수렴됐고, 1920년대 이후 다시 분화·변화·발전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