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조선시대 살인의 한 유형이자 그에 대한 율문인 『대명률(大明律)』의 '위핍인치사(威逼人致死)'의 법률적 의미와 실태, 그에 대한 국가·사회적 대응을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위핍인치사(威逼人致死)'란 위세로 다른 사람을 핍박하여 죽게 한 경우를 다루는 율문이다. 이때 '죽게 한'이라는 것은 피해자가 두려움을 느껴 자살하는 것이다. 반면, 가해자는 피해자를 죽일 의도로 핍박한 것은 아니며, 자살 자체를 강요한 것도 아니다. '위핍인치사'는 타인을 핍박하여 자살하게 되었을 경우, 그 핍박한 가해자에게 장 100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더하여 자살자와 가해자의 관계, 핍박의 원인에 따라 가중 처벌했다.
'위핍인치사'의 법률적 의미는 현대 형법과 비교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현대 형법에서 자살이란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결정으로서 그 결과에 대해 타인에게 책임을 요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살에 대해서 가해자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단, 상대방의 의사를 완전히 제압하고 자살 자체를 강요하여 실행하게 한 경우는 처벌할 수 있다. 그런데 '위핍인치사'가 다루는 상황은 가해자가 살인의 의도를 가지고 피해자의 의사를 완전히 억압할 위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다. 즉, '위핍인치사'는 현대 형법에서는 피해자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법적 대상으로 삼지 않을 자살을 피해 사실로 인정하고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 형법과 비교할 때 '위핍인치사'의 매우 독특한 면모가 드러난다.
조선 사회에서 '위핍인치사'를 적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상명(償命)과 유아지율(由我之律)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명이란 하나의 억울한 죽음은 다른 하나의 죽음을 통해 갚아야 한다는 관념이다. 상명 관념 하에서 자살로 인한 사망 역시 갚아야 할 죽음이었다. '위핍인치사'는 이러한 상명 관념을 반영하여 현실에서 자살을 처리할 수 있게 한 율문이었다. 한편, 조선 사회에서는 행위와 결과 사이에 인과관계를 판정하는 유아지율이 있었다. 유아지율은 현대 형법의 조건설과 유사하다. 조건설이란 '그러한 행위가 없었더라면,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과 같이 논리학의 필요조건이 성립하면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위핍인치사'에 대해 유아지율을 적용하면, '핍박하지 않았더라면,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명제가 성립하게 된다. 이를 통해 자살의 책임을 핍박을 가한 가해자에게 귀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위핍인치사'를 적용하면서 자살에 대한 독특한 인식이 형성된다. '위핍인치사'는 선행 사건으로 핍박과 그 결과로 자살의 발생을 규정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자살이 먼저 발생하며, 사람들은 자살을 먼저 접한 후 어떤 핍박이 있었는지 따져 묻는다. 그러므로 사건의 현장을 이해하는 데 있어 자살에 대한 인식이 선행하는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자살을 다른 사람에 의한 핍살(逼殺), 즉 살인의 결과로 인식하게 된다.
'위핍인치사'의 실태는 피해 결과인 자살을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형사 관련 자료에 기록된 자살을 통해 그 실태를 파악할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사망 원인이 분명히 자살인 경우, 해당 옥사 내 피해 결과가 자살인 경우, 가해자인 피고가 특정된 경우를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실태 파악을 위한 자료로서 검안류 자료, 『완영일록』, 『심리록』과 『일성록』, 『사법품보』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중요한 점은 각 자료가 살옥 절차의 단계별로 생산된 것으로 그 내용이 질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검안류 자료, 『완영일록』은 살옥의 초기 단계에서 생산된 자료로서 기층 사회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면, 『심리록』과 『일성록』에 기록된 사건은 국왕에게 보고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 사건들이었다.
자살자의 성별, 연령, 사건의 유형 등을 차례로 살펴보았고, 이어서 자살자와 피고의 관계를 성별, 신분, 가족 관계 등을 중심으로 확인했다. 이 결과 '위핍인치사'의 경우 신분 문제보다 성별 문제가 중요한 변수라는 것을 확인했다. 피해자인 자살자는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그 비율은 사법처리 단계가 진행될수록 높아졌다. 반대로 가해자는 대부분 남성이었다. 결국, 남성 가해자에 의한 여성 자살이 만연한 범죄 양상이었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핍박의 양상도 주목된다. '위핍인치사'가 선행 사건으로서 핍박과 그 결과 자살을 규정하지만, 현실에서 자살이 발견되면 그것을 유발한 핍박을 찾기 때문에, 특정 핍박을 규정할 수는 없었다. 이는 핍박의 양상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 논문은 크게 두 가지 핍박으로 정리했다. 첫째는 피고가 자살자의 직접 위해를 가한 직접적 핍박이다. 둘째는 피고가 어떤 사람에게 위해를 가했는데, 그 사람의 가족이 자살한 간접적 핍박이다. 간접적 핍박의 경우도 '위핍인치사'를 적용한 사례로 볼 때, 조선 사회에서 자살을 유발할 가해 행위를 매우 폭넓게 이해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위핍인치사'에 대한 당시 사회의 대응을 살펴보았다. 먼저, 국가의 공적인 대응으로서 '위핍인치사'에 대한 심리와 판결 양상을 확인했다. '위핍인치사'에 대한 심리는 율문의 내용을 그대로 적용하여 처벌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건의 유형이나 도덕적 가치에 따라 적절한 판결을 내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 가령, 핍박과 자살이 발생한 상황이 인륜과 같이 도덕적 가치를 현저하게 무너뜨리는 것이라면, 율문의 형량보다 가중 처벌했다. 반대로 사소하거나 우발적인 사건으로 인해 자살이 발생했다면, 가해자에게 최소한의 책임을 지우는 방식으로 처리했다. 독특한 점은 성(性) 문제와 관련한 자살은 핍박의 여부를 충실히 확인하고 핍박과 자살의 인과관계를 밝히는 방향으로 심리했다. 이는 성(性) 문제와 관련한 '간음으로 인한 위핍인치사[因姦威逼]'의 형량이 참형이었기 때문이다. 즉, 성 문제와 관련하여 자살이 발생했다고 하여 모든 자살의 가해자를 참형으로 처벌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핍박과 자살의 인과관계를 엄밀하게 심리함으로서 사형 판결을 줄이고자 했던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하여 자살이 발생한 상황을 그대로 방조할 수 없었기에 강간 미수의 형량에서 가중하여 처벌하는 방식으로 성(性) 문제와 관련한 여성 자살을 처리했다.
'위핍인치사'에 대한 민간 사회의 대응도 살펴보았다. 일반 백성들은 '위핍인치사'에 대한 사법 과정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위핍인치사'에 대한 민간 사회의 대응은 피해 결과인 자살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두 가지 모습을 확인했는데, 첫째는 자살을 발견한 후 신고하는 것이다. 이는 인명(人命) 관련 사건이라는 점에서 너무 당연하지만, 자살의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당시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자살이 '위핍인치사'의 피해가 아니기 때문에, 신고해야 하는 자살과 그렇지 않은 자살이 있었다. 그러므로 일반 백성들은 그에 대해 판단해야 했다. 이러한 판단의 결과로 이어지는 신고의 여부는 '위핍인치사'를 적용해야 할 자살에 대한 인민들의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위핍인치사'는 가해자가 있는 자살이기에, 자살을 목도한 사람들 역시 그 가해자를 찾아 책임 소재를 따질 수 있었다. 당시에는 폭행을 당하거나 피살되면, 가해자의 집에 찾아가 그 책임을 요구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런데 '위핍인치사' 역시 그 관습에 따랐다. 즉, 핍박한 가해자의 집에 자살한 사람의 시신을 가져다 두는 것이다. 이렇게 자살의 책임 소재를 따지는 행위는 '위핍인치사'에 대한 인민의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중요한 점은 자살은 자신이 선택하는 행위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핍박을 당한 사람은 자신이 직접 가해자의 집에 가서 자살했다. 이렇게 자살자가 직접 자살의 장소를 선택함으로써 자살의 의미를 극대화했으며, 자살이 당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복수 내지는 저항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이상으로 18~19세기 조선 사회를 중심으로 '위핍인치사'의 법률적 의미와 실태, 대응 등을 살펴보았다. 조선 형정(刑政)의 맥락에서는 '핍박으로 인해 발생한 자살' 인식하고 처리하는 법 논리, 법 감정 등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피해 결과인 자살을 중으로 보면, 당시 사회에서 자살을 살인의 결과로 인식하고 그에 대해 대응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