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경제적·문화적 식민주의가 존속하는 오늘날, 유럽의 지적 전통과 식민주의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은 유럽의 고전에 새로운 읽기의 가능성을 요청한다. 시대적 한계를 묵과하지도, 맹목적으로 비난하지도 않는 읽기를 통해 고전은 우리 시대에 새롭게 연결될 수 있다. 이러한 다시 읽기의 일환으로 본 논문에서는 1811년 출간된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고전적 노벨레 「산토도밍고 섬의 약혼」을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의 서발턴 개념과 연결하여 읽는 것을 시도한다. 스피박의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를 이 읽기에서 주요한 지침으로 삼는 이유는, 이 텍스트가 가시적 폭력이 아니라 인식론적 폭력에,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이분법이 아니라 이 두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공모 지점에 초점을 맞추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스피박이 제기한 서발턴의 재현 문제를 「산토도밍고 섬의 약혼」의 주인공 토니에게서 읽어냄으로써 작품 속 서술의 전략과 독자의 태도를 분석하고, 이 작품에서 포스트식민주의적 계기가 선취되고 있음을 보일 수 있다.
「산토도밍고 섬의 약혼」에서 토니는 '말하기'를 시도하지만 이 말이 서술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재현의 정치에 의해 은폐되고 전유된다는 점에서 서발턴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때 토니가 서발턴으로 비가시화되는 것은 토니로부터의 말하기 시도가 부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토니의 말이 정당한 듣기의 기회를 얻지 못하도록 하는 인식론적 폭력에 의한 것임에 주목해야 한다. 토니는 인종주의 및 가부장주의적 권력에 의해 끊임없이 주변화되며 공적인 장으로부터 배제됨에도 불구하고 말하기를 통해 정치적 주체로 등장하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토니와 독자 사이를 매개하며 은밀하게 유럽 중심주의적이고 식민주의 가부장적인 인식론적 틀을 강화하는 서술자가 토니의 말하기 시도를 은폐하고 토니를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함으로써 토니는 헤게모니적 담론의 재생산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토니의 서발턴성에 초점을 맞출 때, 표면상으로는 대립하는 것으로 보이는 호앙고의 흑인 민족주의와 슈트룀리의 백인 식민주의가 실제로는 은밀한 공모관계에 있음이 드러난다. 토니에게 표면적으로 자유의지와 '유럽에서의 더 나은 삶'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스타프 역시 토니에게 가부장적 권력의 대상으로서의 존재만을 인가한다는 점에서 호앙고가 토니에게 가하는 가시적 폭력과 마찬가지로 억압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가부장제에 기반하여 남성 인물들 간 성립하는 공모관계는 토니에게 끊임없이 대상화의 위협을 가하나, 토니는 이러한 억압의 희생자로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가부장들이 대변하는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수동적 도구로서만이 아니라 주체로서 무대에 등장하고자 하는 토니의 시도를 토니의 말하기로부터 읽어낼 수 있다. 죽음의 순간 토니가 외친 "당신은 나를 의심하지 말았어야 했어요!"라는 말은 토니 자신을 공적 말하기로부터 배제해 온 가부장제 권력에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토니의 말하기는 서술자에 의해 곧바로 조작되어 전유되며 독자에게 들리는 데에 실패한다. 서술자가 토니를 '구스타프의 충실한 약혼자'로 재현하는 것은 토니를 유럽의 질서 속으로 포섭하기 위한 것으로, 이러한 재현은 토니가 스스로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내놓는 말하기의 결단이 독자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작한다는 점에서 인식론적 폭력으로 작용한다.
토니로부터 스스로 말할 능력을 빼앗고 특정한 재현을 통해 나타나도록 하는 서술자의 전략을 독자는 간파할 필요가 있는데, 은밀하게 작동하는 재현의 전략에 대한 자각의 부재는 독자를 서술자와의 공모관계로 유도하기 때문이다. 토니는 자신을 둘러싼 지배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지 못하지만 또한 완전히 포섭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행동하는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 처해 있다. 독자에게는 유럽 중심주의적 재현을 통해 이처럼 다층적인 정치적 주체인 토니를 환원해버리는 재현의 폭력성에 주목할 것이 요청된다. 토니를 재현하는 모든 종류의 서술이 결코 토니를 완전하게 대변하지 못하며, 스스로를 대변하려는 토니의 시도가 이들 재현에 가려 사라지는 지점을 포착할 때 우리가 가담해 온 인식론적 폭력을 넘어서기 위한 상상력이 토니에게로 향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