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선행연구를 통해 18세기 이전 영산회상 계열 악곡의 "주이복시(周而復始)", 즉 반복 연주방법에 대해서는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19세기에 모음곡 《영산회상》이 대부분 갖춰지면서 반복 연주는 사라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19세기 고악보에는 당시 풍류방에서 연주되던 다양한 연주방법과 악곡경계에 대한 인식이 드러나는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이는 현행 〈상령산〉, 〈중령산〉, 〈세령산〉, 〈가락덜이〉가 파생 관계의 악곡임에도 장별 각 수가 모두 다른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상령산~가락덜이의 다양한 반복 연주방법을 기록한 고악보 『소영집성』(1822)을 포함하여, 6종의 19세기 고악보에 나타난 상령산~가락덜이의 연주방법과 편찬자의 악곡경계 인식을 고찰하였다.
첫째, 19세기 전, 즉 18세기까지 영산회상의 "주이복시(周而復始)"는 중령산 파생 전 '원곡 영산회상'의 연주방법과 중령산 파생 이후의 양상이 다르게 나타났다. 중령산 파생 전에는 『이수삼산재본금보』(1651)의 〈영산회상〉과 같이 14각의 '원곡 영산회상'을 반복 연주하는 방법, 『한금신보』(1724)의 〈영산회상환입〉, 〈영산회상제지〉처럼 14각의 '원곡 영산회상'의 일부 선율을 변화시켜 반복 연주하는 방법이 있었다. 이후 중령산(〈영산회상갑탄〉)이 처음 등장한 『어은보』(1779)에는 반복 연주와 변주가 함께 나타나 '원곡 영산회상' 연주 후 제1~3각의 선율 일부를 변화시킨 돌장(回章; 반복 장)을 연주하고, 제4각(현행 〈상령산〉 제2장 첫째 각)을 기점으로 7괘법으로 변주하거나 '원곡 영산회상'을 다시 반복 연주하였다. 이 때 『어은보』의 편찬자는 7괘 변주가 시작되는 부분부터를 〈영산회상갑탄〉으로 인식하였다.
둘째, 19세기에는 상령산~가락덜이를 '악곡별로 반복하며 계주'하는 연주 방법과 '악곡 반복 없이 계주'하는 연주방법이 공존하였다. 상령산~가락덜이를 '악곡별로 반복하며 계주'하는 방법을 수록한 악보는 『유예지』(1806~1813), 『소영집성』(1822), 『삼죽금보』(1841)로, 특히 『소영집성』에는 '일부 선율을 변화시켜 반복하는 곡'이 '재입(再入)'이라는 별도의 악곡으로 수록되고, 『소영집성』의 '재입' 선율이 『삼죽금보』에는 '별가락'으로 기록되었다. 상령산~가락덜이를 '악곡 반복 없이 계주'하는 방법을 수록한 악보는 『동대금보』(1813), 『오희상금보』(1852), 『희유금보』(1852~1884)로, 이는 19세기에 《영산회상》이 다수의 구성곡을 가진 모음곡이 되면서 반복 연주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악곡이 길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19세기 상령산~가락덜이를 연주방법에는 공통적으로 원곡의 제2장부터 괘법이나 장단을 변주하는 변주관습이 나타났다.
셋째, 19세기의 상령산~가락덜이 수록 악보 중 편찬자가 괘법 또는 장단의 변주 위치를 기준으로 악곡경계를 인식한 악보는 『유예지』, 『삼죽금보』, 『희유금보』였으며, 편찬자가 '원곡 영산회상'의 구조에 근거하여 악곡경계를 인식한 악보로는 『소영집성』과 『오희상금보』가 있었다. 『동대금보』에는 현행 및 다른 고악보와는 다른 독자적인 악곡경계 인식이 나타났다. 이 중 괘법 또는 장단의 변주 위치를 기준으로 삼는 악곡경계 인식이 19세기 중반 무렵 이후 주류를 이룬 것으로 판단되며, 『소영집성』 및 『오희상금보』의 편찬자가 '원곡 영산회상'의 구조를 기준으로 악곡경계를 인식한 것은 두 편찬자의 음악에 대한 지식과 학자적 관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종합하면 18세기 이전의 영산회상에 나타나는 "주이복시(周而復始)", 즉 반복 연주방법은 19세기에 사라진 것이 아니며, 상령산~가락덜이를 반복 연주하는 방법과 계주하는 방법이 19세기에 여러 방식으로 공존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세부적인 선율 변천의 시도들이 고악보에서 '재입(再入)', '별가락'과 같은 형태로 수록되었고, 상령산~가락덜이의 악곡 경계가 편찬자마다 다르게 인식되어 악보에 다양하게 기록되었다. 이처럼 연주자 혹은 풍류방에 따라 차이가 있던 상령산~가락덜이의 연주방법이 19세기 중반 이후 점차 반복 없이 계주하는 방법으로 통일되어 오늘날에 전해졌으며, 변주 위치인 제2장을 기준으로 악곡경계를 나누는 인식이 19세기 중반 이후 주류를 이루어 오늘날에 전승되면서 현행 〈상령산〉~〈가락덜이〉의 악곡경계가 된 것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