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백신애의 작가론을 서술하는 데 있어 '장소'의 문제에 주목한다. 고향에서 오랜 기간 거주했으며 동시에 다양한 외국 체험을 한 바 있는 작가의 생애사적 측면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장소들과의 조우' 이후 백신애가 제출한 기록을 상세히 독해한다.
기존 연구사에서 백신애는 한편으로는 위험천만한 방랑을 감행했던 작가로,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문학 금지와 '오빠'의 사회주의, '어머니'의 사랑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였던 인물로 여겨진다. 또한 백신애의 작품은 그가 한때 헌신했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혹은 빈궁 문학의 맥락에서 조명된다. 백신애의 생애 및 문학에서 특정 부분을 강조하는 연구 경향은 그의 텍스트 속 중요한 지점들을 해명하는 데 높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본고는 그러한 과정에서 여전히 주목받지 못했던 지점들에 관심을 기울이고자 한다.
이 연구는 백신애의 삶과 문학의 중요한 두 축이 '이곳'(고향, 근린, 집)과 '저곳'(외국)이라는 '장소'들에 있음을 밝히고, 그러한 '장소'들이 소설 및 수필에 형상화되는 양상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는 작업을 통해, 백신애의 문학 세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각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과정에서 본고는 첫째, 백신애의 고향에서의 삶에만 주목하거나 그의 이동 양상만을 밝혀내는 등 '이곳에서의 머무름'과 '저곳으로의 이동'을 별개의 것으로 이해할 때, 그의 본질적인 장소 체험 및 이를 바탕으로 제출된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강조한다. 둘째, 백신애가 '이곳'을 정체성의 핵심에 두고 있었으면서도, 동시에 그의 내면에서 발견되는 '저곳'을 향한 '방랑의 욕구'에 관심을 기울인다.
2장에서는 백신애가 텍스트 속에서 '이곳'을 재현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2장 1절에서는 영천과 대구 일대에서 글쓰기를 수행했다는 특징이 백신애를 중심 문학장에서 소외시키는 조건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해당 로컬이 그에게 있어서 부정적인 표상만은 아니었음을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백신애에게 있어 경상북도 지역은 활발한 사회주의 활동의 기반이자 개조 및 개혁의 가능성을 지닌 지역이었으며, 작가와 타자들의 마주침을 가능하게 만든 현장이었다. '로컬'에서의 글쓰기를 통해 백신애의 문학은 커다란 진폭을 보여줄 수 있었다. 2장 2절에서는 백신애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모녀 관계의 특성을 살펴본다. 「나의 어머니」와 「혼명에서」의 '딸'들은 '어머니'와의 소통 불가능성 탓에 고통을 체감하면서도, '어머니'가 제공하는 사랑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작가는 이러한 모녀를 모두 '집'으로 수렴시키는 결말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집'이라는 장소에 부착되어 있던 작가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2장 3절에서는 이푸 투안의 '토포필리아' 개념을 활용하여 백신애의 수필 및 「채색교」 원본과 개작본을 독해한다. 해당 텍스트들에서 '이곳'은 애착의 장소임과 동시에, '이곳'과는 다른 '저곳'을 지향하는 몽상을 가능하게 만드는 장소라는 공통된 관념이 나타난다.
3장에서는 백신애의 이국 체험과 관련된 텍스트들을 살펴본다. 3장 1절에서는 백신애의 문학에 재현되는 두 종류의 모빌리티에 주목한다. 우선, 작가는 「낙오」, 「의혹의 흑모」, 「아름다운 노을」 등의 소설에서 부르주아 여성들의 모빌리티를 그려낸다. 해당 소설의 인물들은 공적인 공간을 애착 어린 사적인 장소로 재구성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또 다른 측면에서, 작가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집 근처를 떠돌거나, 원치 않았던 이주를 떠나야만 하는 빈민들의 모빌리티를 재현한 바 있다. 이와 더불어, 비슷한 시기에 러시아행을 감행한 백신애와 홍양명의 텍스트를 함께 읽는다. 본고는 밀항의 실패 및 구금과 추방 체험은 부르주아 엘리트 작가 백신애와 빈민인 '그들'을 교집합으로 묶어 주는 기억이었으며, 이러한 경험 이후 백신애의 문학에 하층 계급의 모빌리티가 돌출된다고 판단한다. 3장 2절에서는 방랑 이후 제출된 백신애의 기행문에 관심을 기울인다. 백신애는 외국에 대한 오랜 동경을 품고 조선 땅을 떠났으나, 자신이 오래도록 꿈꿔 왔던 '저곳'이 실질적으로는 억압이 상존하는 고통스러운 공간임을 발견한다. 본고는 여정에서 돌아와 기행문을 작성할 때, 아름다운 기억을 취사선택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청도를 점거하고 있는 백인들의 신체 및 도시의 미학적인 풍경에 찬탄하는 그의 태도가 자칫 제국주의의 영향력을 간과할 수 있다는 문제적 지점을 살펴본다. 더불어 이러한 태도의 연장선상에서 백신애의 후기 문학이 빈민들과의 연대의 가능성을 상실하였던 장면에 주목한다. 3장 3절에서는 백신애의 문학에 등장하는 '아픈 몸'의 모빌리티를 살핀다. 그의 문학은 줄곧 '생존의 의지'와 '이동의 의지'를 연결시키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텍스트를 독해하는 데 있어 '어딘가로 떠나는 행위'는 결코 간과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백신애의 문학에서 '이곳'은 애착과 억압의 장소이자, 다른 세계를 꿈꾸게 하는 장소로 그려지며, '저곳'은 동경의 대상이면서, 이주민에 대한 억압 혹은 식민 지배의 참혹함을 마주치게 하는 장소로도 나타난다. 이러한 '장소들과의 조우' 이후 백신애는 자신의 문학에 다양한 인물들을 구현한다.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되돌아오는 딸들, 자유로운 여행과 유학을 실천하는 부르주아들, 낯선 땅으로의 이주를 감행하는 빈민들, 화려한 이국 도시의 백인 관광객과 그들의 인력거를 끄는 중국인 노동자들, 아픈 몸을 감내하며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는 여성들은 백신애 문학의 중심에 놓여 있다. 본고는 방랑과 정주를 반복하는 생애 속에서 제출되었던 백신애 문학의 핵심은 바로 '다양한 장소 및 그 안에서 움직이는 인물들'에 있음을 밝히면서, 그의 문학 세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하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