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민중미술 진영의 평론가로 알려진 성완경의 1980~1990년대 벽화 프로젝트에 주목함으로써 그를 미술생산자로 조명한다. 성완경의 벽화 프로젝트는 기존 미술사 서술에서 충분히 검토되지 않았다. 그 까닭은 그의 벽화가 민중미술과 모더니즘이라는 1980년대 한국미술의 두 경향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의 벽화는 모더니즘적 '환경조형물'뿐만 아니라 민중미술의 '거리의 미술'과도 차이를 보인다. 이 논문은 "미술의 사회화"라는 그의 일관적인 목표가 이와 같은 차이를 만들어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미술의 사회화"는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미술의) 실제적 체험"을 가리킨다. 이는 미술이 '전당(殿堂)' 안에 모셔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생산, 수용, 작용해야 함을 의미한다. 본 논문은 성완경이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진행했던 벽화 및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이와 같은 "미술의 사회화"의 지속적인 시도였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1975년 프랑스에서 벽화를 공부하고 귀국한 성완경은 한국미술이 속물적인 취향에 영합하여 민중의 현실을 소외시켜 왔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현실과 발언(이하 '현발') 창립전에서 미술관 밖의 대중매체에 범람하는 이미지들의 콜라주 작업, 그리고 도시의 스펙터클을 찍은 사진 작업들을 통해 당대 이미지가 처한 현실을 직시할 것을 제안했다. 이후 성완경의 작업 형식은 미디어에서 대량 생산되는 이미지를 활용한 포토콜라주에서 도시 시각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한 벽화 제작으로 전환되었다. 1983년 『서울특별시 주요 간선도로변 도시설계』 참여는 그 기점이 되었다. 그 배경에는 '현발'에서 시작된 "매체 탐구"가 있었다. 1982년에 '현발'은 출판, 판화, 벽화 세 분야로 나누어 회화 외 다양한 미술의 표현 매체를 탐구하는 소그룹 활동을 시작했다. 성완경은 출판 활동으로 최민과 함께 무크지 『시각과 언어 1』을 펴내고 벽화를 연구하면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중요한 생활 장소이자 미술관 밖 미적 체험의 장소가 된 도시의 거리에 주목했다. 즉 벽화에 대한 성완경의 관심은 도시의 시각 환경 변화에 대한 미술적 대응에 해당한다.
이후 성완경은 1985년부터 빅아트 벽화연구소(이하 '빅아트')를 설립하여 벽화 전문가로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는 1985년 중소기업진흥공단 연수원 기숙사 벽화, 1986년 서울투자금융 하늘공원 벽화, 1987년 부산시 지하철 중앙동역 벽화, 1996년 서울시 지하철 김포공항역 벽화 등을 제작했다. '빅아트'는 장식과 교양으로 소비되는 미술을 넘어 동시대의 실질적인 삶의 이야기를 민중들과 공유하는 미술을 뜻한다. 성완경은 민중의 일상생활 일부에서 소통하는 미술의 형식으로서 벽화를 제작했다. 그는 미술관에서 본 듯한 조형물들이 크기만 확장되어 맥락 없이 거리에 위치하는 현상을 두고 화랑과 시장의 관례적인 공모 관계에서 비롯된 산물이라고 비판했다. 그렇다고 성완경의 벽화 작업이 제도 외부에서 진행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1980년대 중후반의 민중운동과 비교했을 때 '빅아트'의 작업들은 공공기관이나 사기업의 의뢰를 받아 진행되었기에 철저히 전문성을 갖추고 제도의 보호 아래 진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성완경은 당대의 두 조류로부터 거리를 두었기에, 그의 벽화 프로젝트는 당대 민중미술과 모더니즘 환경 조형에 대한 논의 모두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성완경의 벽화는 1980년대 미술사 서술 기저에서 작동하는 민중미술과 모더니즘의 두 서사로 환원되지 않는 미술 실천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1990년대로 이어진 성완경의 프로젝트는 벽화를 넘어서 보다 다양한 미술의 공적 소통전략을 고안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성완경은 '빅아트'라는 회사명을 '상산환경조형연구소'로 변경하고, 아카익 문화공학연구소(이하 '아카익')를 부설했다. 그는 미술비평연구회의 구성원 일부를 '아카익'에 영입해 공공미술 연구를 이어갔다. 당시 그는 문화적 산물이 자의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작 과정 전반의 치밀한 계획과 조정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물이라고 전제하는 '문화공학'이라는 개념을 제출했다. '아카익'에서는 공공미술을 건축, 도시, 환경 등 다각적인 분과와 함께 연구하면서 작품의 기능과 효과를 검토하고, 문화를 기획, 설계, 자원 배분, 예산, 조직 관리 등 세부적인 과정에서 연구하여 현실에 적용하고자 했다. '문화공학'은 공공미술뿐만 아니라 1990년대 중반 이후 성완경의 전시기획을 비롯한 미술생산자로서의 활동에 핵심이 된다. 1990년대 초반 공공미술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미술의 공공성 담론이 증가하는 맥락 속에서 성완경은 벽화뿐만 아니라 옥외조형물과 '키네틱아트' 등으로 매체를 다변화하고 조직 구성에 변화를 꾀하였다. 성완경의 '상산환경조형연구소'는 1996년 문을 닫았으나, 성완경이 참여했던 미술의 공공성에 대한 논의는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이후 포스트 민중미술에서 비판적 차원에서의 공적 미술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