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한국 출신의 재 오스트리아 작가 안나 김 Anna Kim (1977-)의 소설 『얼어붙은 시간 Die gefrorene Zeit』(2008)에 나타나는 '경계 허물기' 전략을 크게 형식적인 측면과 내용적인 측면에서 살펴본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되는 이런 작업은 예의 전략에서 드러나는 특징 및 의미를 해체론적 관점에서 규명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둔다.
최근 독일어권 '주류' 문단의 유일한 한인 작가로 떠오르는 안나 김의 작품 『얼어붙은 시간』은 발칸 지역에서 3만여 명이 실종되고 거의 대부분이 학살되었던 코소보 전쟁 참사를 특이한 시각으로 서술한 작품이다. 서사의 표면에서는 1인칭 여성 서술자이자 난민 지원자가 코소보 전쟁으로 실종된 아내를 찾는 남성의 이야기를 그린다. 일차적으로 그의 아내는 실종으로 인해, 조금 더 심층적으로 남자는 슬픔과 공포, 희망의 상실로 인해 삶과 일상의 시간이 정지된(얼어붙은) 상황에, 말하자면 과거에 머물러있다. 여기서 서사의 표면에 등장하는 남자는 그렇게 얼어붙은 시간이 완전히 녹아 스스로의 '현재'를 회복함으로써 규칙적이고 '살아있는' 시간 속으로 되돌아가려면 아내와의 재상봉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서사에 내재된 작품 주제는 삶의 '불확실함과 모호함', 그리고 이로 인한 인간 존재의 감성 및 의식의 '양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제의 구현을 위해 안나 김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독특한 서술 전략을 보여준다. 우선 현대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1인칭 형식과 3인칭 형식에 비해 드물게 나타나는 2인칭 형식으로 서사를 전개하며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즉 작품 내적인 의미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또한 중재자적이거나 등장인물적인, 혹은 완전히 중재자적이지도 않고 등장인물적이지도 않은 '복합적이고 모호한' 서술 태도의 1인칭 서술자를 등장시킴으로써 작품의 서사 시간으로서의 과거, 현재, 미래를 뒤섞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사' 내적 독백을 통해 때로는 등장인물의 관점에 동조하고, 때로는 그것을 조롱하는 '이중적인' 서술 입장을 보인다. 언어 사용에서는 이중적이고 다층적인 의미 구성을 통해 언어적 모호함과 양가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나아가 일반적으로 규정된 문장 형식을 탈피하여 비정상적으로 문장을 나누거나, 구두법을 해체하는 등 규범을 넘어가는 방식으로 경계 허물기를 구현하기도 한다.
작품의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코소보) 전쟁을 배경으로 삶에서 자주 거론되는 문제들의 방법론적인 이분법 및 그 경계를 허무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선 흔히 이해되고 있는바 나이, 의복, 질병의 유무 등으로 나타나는 표면적인 것이 한 인간의 '자기 정체성'과 일치하는지를 되물으며, 인간의 정체성은 매번 서로 다른 것에 의해 대체되는 불명확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끔찍한 전쟁의 참상에 무뎌져가는 코소보 피난 이주자를 통해 전쟁과 일상이 구분될 수 없으며, 존재와 부재 역시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현상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독일어권에 삶의 기반을 둔 1인칭 서술자의 타문화(코소보 문화) 체험은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의 경계가 매우 유동적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전래된 가부장제가 유지되고 있는 코소보 공동체 속에서의 성 규범을 거부하는 남성과 여성을 통해 전통적인 성역할 구조의 해체를 보여주기도 한다.
안나 김의 소설 『얼어붙은 시간』에 나타나는 경계 허물기 전략은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든 경계 및 이로 인한 격렬한 갈등과 폭력을 환기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 삶의 대부분을 오스트리아에서 보내고 있는 작가 안나 김은 두 문화권 사이에서 다양한 형태의 경계선을 자주 체험했을 것이다. 이에 대한 그녀의 반응이 『얼어붙은 시간』에서 나타나는 경계 허물기 전략이라면, 그녀는 '일반적인' 다문화 작가들과 달리 '나'와 '너', 혹은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을 구별하기보다 그러한 개념을 구성하거나 재구성하는 일 자체를 지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안나 김의 이와 같은 문학적 경향은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비판적 해체주의의 정신에 부합한다는 점에서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특성을 띤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성이 오늘날 각 인간 존재의 특이성과 다양성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에서 출발하여, 여전히 극복되지 않은 코비드19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극복하고, 서로 다르게 체계화된 여러 영역의 융합적인 수행을 넘어, 인간과 자연의 공존과 상생을 위해 어디에서나 긴급히 요구되는 '창조적 인식과 실천'의 필요성을 대변할 수 있다면, 한때 삶을 밝혀가던 문학의 의미가 다시 살아나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지금까지 국내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독일어권의 작가 안나 김 및 그녀의 작품은 더욱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