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이성애 여성 소비 주체에 의한 남성 동성애물로서의 BL(Boy's Love) 장르의 특성을 '아카이브'라는 개념을 통해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초기 BL 장르는 '야오이', '동인물' 등의 이름으로 일부 여성 독자들을 중심으로 향유되며 음지 문화 취급을 받았다. 그러다가 2000년대 웹툰·웹소설 플랫폼이 생겨난 이후 2010년대부터 플랫폼 내에서 본격적으로 'BL'이라는 장르 명칭으로 굳어지며 양지화되는 추세를 보인다. 2018년 리디에서 웹소설로 출간된 후 2022년 왓챠에서 드라마화된 〈시맨틱 에러〉는 BL 장르의 대중화를 견인한 중요한 작품이다. 〈시맨틱 에러〉의 상업적 성공이 보여주듯 BL 장르를 소비하는 여성 주체의 데이터베이스 단위의 취향 세분화는 오늘날의 IP(Intellectual Property) 비즈니스 환경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BL 장르의 산업적 발전과 맞물려 BL 관련 연구도 점차 다각화되는 추세에 있다. 그중에서도 플랫폼 등 생산·소비 환경과 관련된 산업적 관점과, 여성 소비 주체들의 심리와 관련된 젠더적 관점의 연구가 가장 대표적이다. 본 논문은 '아카이브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BL 장르의 산업적·젠더적 관점을 종합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BL 장르는 이성애 서사에 출처를 두되 자체 부호 체계와 재현 매커니즘을 거쳐 무궁무진하게 확장하는 '아카이브'적 특성을 지닌 장르로 간주할 수 있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본 논문은 데리다의 '아카이브' 개념과 인지심리학의 '스키마' 이론을 차용하여, BL 장르를 소비하는 수행적 행위 주체인 여성의 인식론적 틀로서 'BL 아카이브 스키마'를 제시하였다. 해당 스키마에 따르면 BL 아카이브의 여성 소비 주체들은 이성애 서사를 투사한 데이터베이스를 여러 기억 단계를 거쳐 부호화한다. 또한 이들 부호를 변형·재조합하여 새로운 BL 텍스트를 창출한다. 여러 플랫폼 내 BL 장르의 키워드 개수가 타 장르의 그것을 상회하는 까닭도 특유의 부호 체계와 관련된 여성 소비 주체들의 스키마가 강하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플랫폼 내 BL 키워드는 이러한 부호가 고착화된 형태이며, 텍스트는 이러한 키워드를 중심으로 다양한 콘텍스트를 결합하여 재현한 형태라 할 수 있다.
〈시맨틱 에러〉는 가장 시의적·대중적인 BL 텍스트로서 다음과 같은 BL 아카이브의 세 가지 특징을 재현한다. 먼저 남녀를 투사한 이분법적 부호 체계가 점차 탈젠더화되고 사랑을 하는 당사자가 두 명이라는 본질을 환기하는 차원에서 기능적으로 활용된다. 또한 작금의 BL 아카이브 여성 소비 주체들은 남성 대상과 여성 주체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통해 서사의 주제와 의미망을 확장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성찰은 퀴어와 페미니즘의 맥락을 확보한 BL 텍스트를 소비하려는 욕망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기능화된 측면이 있으나, BL 장르의 문제적 담론인 비당사자성의 대안을 마련하는 의의가 있다. 마지막으로 〈시맨틱 에러〉는 아이돌 팬덤, 퀴어 텍스트, 이성애 로맨틱코미디 등 상충되는 여러 콘텍스트를 자유자재로 수렴하면서 아카이브적 의미망을 확장한다. 이를 통해 BL 아카이브의 본질이 특정 질서나 가치의 지향이 아닌, 유희와 향유를 위하여 다양한 텍스트를 수렴하고 이를 기능화하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BL 아카이브의 양적·질적 성장은 여성 소비 주체들이 수많은 기호(記號) 속에서 자신의 기호(嗜好)를 보다 효율적으로, 경제적으로 소비하기 위해 기능적인 부호화 매커니즘을 채택하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