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고려시대 外官의 임명 사례를 분석하여 任用體系의 大體를 밝히고 그 의미를 고찰하였다. 고려 외관은 京官에 조응하여 일정한 품질에 도달한 관인을 대상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외관의 구조는 모두 3층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初仕外官職은 초입사자에게 최초로 제수되는 외관직, 界首官 判官 및 일반 主縣守令은 叅上職과 叅外職의 계선에 재임하고 있는 관인에게 제수되는 외관직, 그리고 界首官 守令은 6품 이상의 참상직에 재임하고 있는 관인에게 제수되는 외관직이었다. 이에 외관의 3층 구조의 성립·운영·변화를 살펴보았다.
초사외관직은 성종대 京·牧·都護府에서 처음 운용되었다. 이는 995년(성종 14)에 王可道가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西京掌書記에 보임되었던 내용에서 비롯된다. 西京留守官에는 知西京留守事, 西京副留守, 西京留守判官, 司錄叅軍事, 掌書記, 法曹가 두어졌는데, 이중 사록참군사와 장서기를 과거급제자에게 제수한 것이다.
과거급제자를 사록참군사·장서기에 보임한 이유는 고려가 거점을 중심으로 지방을 간접지배했기 때문이었다. 고려는 경·목·도호부를 거점으로 하여 외관을 중첩적으로 설치하였고, 사록참군사·장서기로 하여금 지방 향리와 긴밀히 행정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과거급제자는 문한의 능력이 검증된 사람들로 문서 행정에 능했다. 그러므로 그들을 사록참군사·장서기로 파견하게 되었다.
초사외관직은 고려 지방제도가 완비되는 1018년(현종 9)에 일반 주현으로 확대되었다. 州·府·郡·防禦鎭의 判官과 縣·鎭의 縣尉·鎭副將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반 주현의 초사외관직은 경·목·도호부의 초사외관직과 달리 과거 급제자 뿐만 아니라 음서 출신 관인에게도 제수되었다. 이는 초사외관직의 양적 확대를 수반하였다.
현종대 지방제도의 특징은 주현-속현 체제로 일컬어진다. 일반 주현도 거점으로 속현을 관할하였는데, 여기에 2인 이상의 외관이 중첩적으로 설치되었다. 일반 주현의 관할 범위 중에는 계수관에 준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부·군·방어진의 판관과 현위·진부장은 사록참군사·장서기와 마찬가지로 지방 향리와 긴밀하게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이는 성종대 지방 통치 방식의 확대를 의미하였다.
고려는 효과적인 지방 통치를 위해 모든 주현에 초사외관직을 설치하게 되었다. 다만 초사외관직은 초입사자에게도 기회로 작용하였다. 실직 경력과 행정 경험이 전무한 관인들은 외관에 임명되어 지방에 파견됨으로써 3년 동안 실적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임기를 마치고 개경으로 돌아와 중앙 관인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즉 초사외관직의 성립과 확대는 정부의 입장에서는 효과적인 지방통치를 가져올 수 있었고, 초입사자의 입장에서는 추후 개경에서 현달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다.
1106년(예종 1)에 정부는 속현에 監務를 설치하여 유민안집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梁元俊 등의 사례를 보건대 감무는 초사외관직으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감무는 일반 주현의 초사외관직과 마찬가지로 입사방법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초입사자에게 제수될 수 있었다.
1172년(명종 2)에 李俊儀에 의해 다시 한번 감무가 증파되었다. 기본적으로 감무의 임명은 예종대에 정해진 것과 다른 점이 없었는데, 일부 감무를 역임했던 사례 중에 무반가문의 자제, 國子監試 합격자, 가족구성원의 공훈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또한 고종대 이후로 주·부·군 판관 및 현위가 혁파되어 초사외관직이 감축되었는데, 예종대와 명종대에 감무의 증치로 외관의 관할을 받는 군현이 증가하였기에 나타난 결과였다. 고려의 지방 지배는 감무 등 외관의 증치를 통해 점진적으로 1수령-1군현으로 변모하였다. 그러므로 감무의 성격은 단독 수령으로 바뀌었고, 이는 초사외관직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계수관 판관과 일반 주현 수령은 참상직과 참외직의 계선에 위치한 관인에게 제수되는 관직이었다. 995년에 경·목·도호부의 직제가 마련되었고, 판관의 임명 기준도 이때 정해졌다고 여겨진다. 1018년에 계수관제가 정비되면서 판관은 경·목·도호부의 차관으로 존속하였다. 계수관 판관에는 참상직자와 참외직자 모두 나갈 수 있었는데, 참상직에 해당하는 경직을 겸대하도록 하여 지방 사회에서 그 지위를 나타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일반 주현은 민정적 성격의 주·부·군·현과 군정적 성격의 방어진·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주·부·군·방어진의 수령은 계수관 판관과 임명 조건에서 동일하였지만, 현·진의 수령은 다소 낮았다. 1018년 이전에 주·부·군·방어진의 수령은 이미 마련되어 있었고, 1018년 이후에는 가장 광범위하면서도 보편적인 관직이었다. 그러므로 이 관직에 충원할 관인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고려의 관인은 초사외관직을 비롯하여 권무직과 참외직을 역임하여 文과 吏에 대한 능력이 검증받았고 7품 이상 6품 이하에 이르게 되면 외관을 통해 참상직으로 승진할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현령과 진장은 초사외관직 이상 8품 이하의 실직 경력을 보유한 관인에게 제수하였다. 이로 보면 현령과 진장은 초사외관직보다는 상위이지만, 계수관 판관 및 일반 주현 수령보다는 하위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高麗史』 백관지 외직 및 식화지 외관록 등을 보면 현령과 진장은 초사외관직과 유사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일반 주현 외관의 품질과 대우는 계수관 외관에 대응시키는 방법으로 정해졌다. 주·부·군수령이 계수관 판관과 유사한 지위여야 했으므로, 현령과 진장은 그보다는 낮게 책정해야 했다. 따라서 현령과 진장의 품질을 6품 이상보다 한 단계 낮은 7품 이상으로 정했는데, 이것이 초사외관직의 품질과 동일하게 되는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다만 현령과 진장은 일반 주현 수령에 해당되므로 실제 임명에서는 초사외관직보다는 높게 하고 계수관 판관 및 일반 주현 수령보다는 낮게 했다고 여겨진다.
계수관 판관과 일반 주현 수령의 임명 기준은 1308년(충선왕 복위)에 변화가 수반되었다. 먼저 주·부·군·현 중에서 부의 지위가 상승되었다. 이에 일반 주현은 주·군·현으로 고쳐졌다. 주·군의 수령은 6품 이상의 관인에게 제수된 반면, 현령은 신분적으로 하자가 있는 인물이 임명되기도 하는 등 일정한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판관과 현위가 폐지되어 일반 주현에는 수령만이 파견되도록 하여 1수령-1군현 체제로 바뀌어갔다.
계수관 수령은 고려의 외관 중 가장 지위가 높은 관직이었다. 다만 경의 수령과목·도호부의 수령 사이에 일정한 지위의 차이가 있었다. 지서경유수사와 東京留守使는 3품 관인에게, 서경부유수와 東京副留守는 4품 관인에게 제수되었다. 다만 南京留守와 南京副留守는 서경과 동경의 수령보다는 그 지위가 낮아 4~5품 관인에게 제수되는 차이를 보인다.
목·도호부의 수령은 남경의 수령보다 근소하게 낮은 5~6품의 임명 기준을 지녔다. 그러므로 목·도호부 수령의 지위는 경의 수령보다 하위에 위치하였고, 참상직에 해당되는 관인에게 제수되었다. 다만 초사외관직과 계수관 판관 및 일반 주현 수령은 그 경력을 보유하면 다시 나가지 않았는데, 계수관 수령은 먼저 목·도호부에 다녀온 후 재차 경의 수령에 제수되었다. 이는 경의 수령과 목·도호부의 수령 사이에 계선이 있었음을 의미하며, 경이 가지는 상징성을 드러낸 것으로 여겨진다.
계수관 수령의 변화는 고종대부터 본격화되었다. 주·부·군 중에 도호부로 승격되는 고을이 다수 등장하여 계수관의 양적 확대를 가져왔다. 또한 1308년에 지방제도가 개편되면서 서경·동경·남경을 平壤府·鷄林府·漢陽府로 바꾸고 목·도호부와 일부의 일반 주현을 모두 목으로 고쳤다. 또한 1310년에 또다시 일부 목을 부로 강등하였다. 이 과정에서 약 290년동안 유지되어왔던 고려 외관의 임명 기준이 모두 변화하였다. 府尹과 牧使는 3품 관인에게 검교재신을 겸대하도록 하고, 知府事에는 4품 관인을 파견한 것이다.
이렇듯 고려의 외관 임용체계는 장기적으로 지속되었다는 특징을 지닌다. 비록 감무의 증치와 군현의 특례 승격 등의 변화가 따를 수 있는 요인도 있었지만, 1018년에 마련된 기본적인 운영원리는 충선왕대에 이르러서야 고쳐진 것이다. 고려는 국초부터 외관을 설치하고 중앙의 관인을 파견하여 지방을 통치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성종대와 현종대를 거쳐 제도적으로 완결성을 지닌 형태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다만 외관의 임명 기준에 부합하는 관인을 모두 지방에 파견한 것은 아니었다. 고려는 외관을 파견함에 있어서 효과적인 지방 통치를 구현하기 위해 적합한 인물을 꾸준히 선발하였다. 외관으로 파견할 중앙 관인을 선발하는 과정은 고위 관인이 임명 기준에 부합하는 관인을 천거하고 尙書吏部에서 銓注하여 批目을 작성해 국왕에게 결재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국왕이 외관 인사에 결재하여 외관의 임명이 이루어졌고, 마지막으로 臺諫의 署經을 거쳐야 했다. 이는 외관의 인사행정이 경관과 동일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고려의 외관제는 경관제의 구조 안에서 운영되었다는 특징을 지니며 고려의 관인은 외관에 임명되는데 있어 거부하지 않았다.
고려의 외관제는 무신집권기 이후로 문란해졌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외관의 인사에 직결되는 변화는 인사 적체 현상과 文武交差制를 꼽을 수 있는데, 이것이 당대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외관의 인사 적체는 초사외관직의 임명 과정에서 과거급제자에 한해 주로 나타났다. 이는 고려의 과거가 정기적으로 시행되고 또 급제 인원이 규정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즉 고려전기에 과거는 필요에 따라 관인을 선발하기 위한 임용시험의 성격을 지녔다면, 무신집권기에 과거는 자격시험의 성격으로 전환되었다.
문무교차제는 2인 이상의 외관이 설치된 고을에 적용되는 특성을 지녔다. 즉 文班과 武班이 함께 기용되어 지방을 통치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감무가 파견된 고을을 제외한 모든 주현에 문무교차제가 적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초사외관직에는 무반이 파견된 사례가 전무하였다. 또한 계수관과 일반 주현에도 주로 문반 위주의 임명이 이루어졌다. 이는 문반이 행정적으로 무반보다 능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무신집정은 지방에 대한 착취·수탈보다는 안정을 기하여 정권을 유지하려 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인하여 고려 외관 임용체계는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