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의 목적은 한청통상조약이 체결되는 과정을 밝히고 청이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기로 정책을 전환한 이유를 규명하는 것이다. 청일전쟁이 종결된 이후 청과 일본이 체결한 下關條約에는 조선의 완전무결한 자주독립이 명시되었다. 하지만 이후 청은 조선에 대하여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조선의 조약 체결 요청을 거절하였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한 상황을 보았을 때, 조선은 주권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이 아니기 때문에 청과 대등한 관계로 조약을 체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청 상인의 보호를 위해 조선에 파견되어 있었던 당소의는 조선이 藩屬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한 총리아문은 오랫동안 속국이었던 조선과 대등한 관계로 조약을 체결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屬國之體'를 유지하기 위한 정책을 마련하였다. 이에 따라 청은 조선의 조약 체결 요구에 대응하여 총영사를 파견하고 통상장정을 체결하고자 하였다. 이는 결국 조선을 여전히 속국으로 취급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사실상 청에 조선의 요청을 받아줄 의무는 없었다. 下關條約에는 조선과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점이 명시되지 않았으며, 조선도 조약 체결을 강요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 요청은 계속되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약 체결 현안에 결부된 황제 칭호에 대한 문제가 부상하였다. 고종은 환궁한 이후 稱帝를 청하는 여론에 힘입어 황제로 즉위하였다. 고종은 무엇보다 황제 칭호에 대한 각국의 승인에 주의를 기울였는데, 각국의 의견은 긍정적이지 않았다. 청도 고종이 황제 칭호를 사용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세웠다. 하지만 조선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러시아와 일본의 경쟁 속에서 청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 의해 황제 칭호가 승인되었다. 이후 조선과 청의 관계 재정립 문제에도 이에 대한 문제가 중요한 안건이 되었다.
특히 양국의 조약 체결에 관한 문제는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었다. 당시 청에서는 러시아의 남하에 위협을 느끼기 시작하였고, 聯俄論 대신 聯英, 聯日論 정책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정부는 청에 사신 파견의 뜻을 전달하는 동시에 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각국의 알선(intercession)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양국의 조약 체결 문제에 영국과 일본을 비롯한 각국의 권고가 이루어졌다. 청은 조선의 요청에 반대 의사를 표시하면서 각국의 권고도 거절하였지만, 이와 같은 정책은 계속되지 않았다.
마침내 광서제는 무술변법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조선의 요청을 수용하여 조약 체결을 위한 사신의 파견을 허용하였다. 그리고 광서제의 결정은 영국, 일본의 알선과 무관하지 않았다. 청은 러시아에 대처하기 위해 영국, 일본의 힘이 필요하였고, 영국과 일본도 청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특히 이 시점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청 방문은 주목되는 지점이다. 청의 聯英, 聯日論에 호응하여 청을 방문하고자 했던 이토는 조선을 경유하였다. 그리고 고종은 이토와의 접견 자리에서도 청과의 조약 체결에 대하여 자문하였고, 알선을 요청하였다.
결국 청의 정책 전환은 무술변법을 비롯한 청의 내부적인 요인으로만 파악될 수 없다. 청은 당시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에 의한 영토 분할을 겪고 있었고, 이에 따라 자국의 안정을 위해 열강과의 관계에 민감하게 반응해야만 하였다. 요컨대 청에서는 러시아의 여순, 대련 점령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聯英, 聯日論이 형성되었고, 조선의 요청에 따른 영국과 일본의 알선으로 인해 정책이 전환된 것이었다.
이후 청은 총영사 대신 조약 체결을 위한 2등 사신인 특명전권공사로 서수붕을 파견하였으며, 국서에는 고종의 칭호로 황제를 명시하였다. 양국은 여러 차례의 교섭을 거쳐 1899년 9월 11일 대등한 관계가 명시된 한청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를 통해 양국은 청일전쟁 이후 단절되었던 국가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청의 정책 전환은 당시 동아시아 정세와 연관이 있었을 뿐, 청의 조선에 대한 속국 인식의 전환에 그 근본적인 이유가 있지 않았다. 이에 따라 한청통상조약의 체결 이후에도 조약에 명시된 양국 사이의 현안은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