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일본인에게 있어 미국은 무엇이었나? 이러한 물음에서 출발하는 본 연구는, 그 해답을 얻고자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통해 1962년부터 1964년까지 프린스턴 대학에 2년간 몸담은 문예비평가 에토 준의 미국 체험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에토 준이 미국에 체류하던 시기, 냉전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일어난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은 그에게 큰 정동을 일으켰다. 특히 미국이라는 타자를 처음 직면하여 일본인 문예평론가로서의 자기동일성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그는, 동시에 당대 논단을 달군 일본근대화론의 영향으로 국가의 과거에 천착하게 된다. 과거로의 회귀를 통해 그는 메이지 국가를 재구축하게 되는 한편 전후라는 공간을 부정하기에 이르고, 또 동시에 자기동일성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한편, 민권 운동과 흑백 갈등이 절정에 달한 1960년대 중반, 일본계 미국인들에게는 모범적 소수민족(Model Minority)이라는 표상이 부여된다. 특유의 근면 성실함과 생활 윤리를 통해 모범적으로 미국 사회에 동화된 일본인들을 위한 이 신화는, 되레 타 소수 인종과의 격차를 강조하고 대립과 차별을 야기하며 백인 중심의 지배구조를 고착시키는 데에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 미국에서 일본의 역사와 자기 자신의 연속성을 회복하고 백인 사회에 동화되고자 기울인 에토 준의 노력 속에서 바로 이 신화 탄생의 전조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에토가 미국에서 이룬 자기동일성의 회복과 미국 사회로의 성공적인 동화는 점차 그에게 미국이라는 '타자'의 타자성을 상실하고 자기 안으로 흡수하는 결과를 낳았다. '자기'와 비대칭적인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발아한 협소한 것으로 전락하게 된 그의 왜곡된 타자는 그의 문학 비평과 역사 인식에도 영향을 미치며 그의 보수적 사상을 다듬어 나갔다. 본 논문은 에토 준의 미국 체험 수기 『미국과 나』 및 같은 시기 그의 논고들을 통해 이러한 전 과정을 규명해 나가는 연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