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고는 다니엘 크볼손이 19세기 말에서부터 세미리에치에 지역에서 발견된 시리아 동방교회의 비석을 연구한 자료 즉 그가 소개한 무덤 새김글 22건의 자료에 기초한다. 필자는 크볼손이 소개하는 22개의 무덤 새김글을 다루기에 앞서 그것의 큰 배경이 되는 시리아 동방교회의 기원에서 시작하여 시리아의 안디옥 학파가 서방교회로부터의 신학적, 제도적 독립에 이르는 간략한 역사를 다루었다. 이는 시리아 동방교회의 탄생에서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유프라테스강 동쪽 지역의 전설적인 원시동방교회의 역사적 실체와 시리아 동방교회가 네스토리우스라는 다소 부정적인 명칭으로 불리우는 역사적 원인을 밝힌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르의 신학과 네스토리우스의 신인양성론과는 다르고 그 보다 오래된 시리아 동방교회의 전통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사도 도마와 다대오 즉 아다이, 아가이와 마리로 연결되는 독자적인 사도성이 그렇다. 그리고 나아가 4세기초부터 시작된 기독론 논쟁이 불러일으킨 교회의 대분열에서 탄생한 시리아 동방교회의 정체성과 교리적 성격에 주목했다. 이는 원시 동방교회를 계승한 페르시아 교회와 안디옥 학파 양성론자들이 결합하여 탄생한 민족적이고 신학적이며 외면적으로는 당시 제국들의 역학 관계 속에서 비롯된 정치적인 결과물이다. 크볼손이 본서에 다루는 22개 비문의 특징은 먼저, 셀레우코스력과 동양 문화권의 동물력이 사용된 이중의 연대기록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빌론력을 개정한 셀레우코스력은 시리아인들이 사용한 태양태음력이고 12지 동물력은 몽골·튀르크족 유목민들의 역법이었다. 이러한 두 가지 역법의 병용은 당시 페르시아-이슬람 문화권에서 볼 수 있는 역법의 사용 방식이다. 새김글에는 시리아 동방교회의 성직자 직함들과 교회 안의 여러 고유한 직함들이 발견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13-14세기 세미리에치에 지역에 분포했던 시리아 동방교회가 교회 학교 및 수도원에서 사제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교육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당시 튀르크어를 주류 언어로 사용하는 주민들을 상대로 한 종교 언어인 시리아 언어와 성서, 그리고 교리 교육이었을 것이다. 이는 필자가 이번 22개의 시리아어 무덤 새김글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간혹 비문 저자에 의한 튀르크 12지 표기가 맞지 않거나 문법적인 오류를 발견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은 그 당시 시리아 동방교회에서 시리아어가 종교언어로서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교인들의 실생활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교회 학교나 수도원에서 일종의 외국어로 학습되었던 정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종종 발견되는 철자법의 오류와 같은 작가의 빈번한 실수는 오로지 부족한 학습의 결과로 말하기 보다는, 특정한 방식으로 발음하는 튀르크인들의 언어 습관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한 단어의 처음자리에 오는 이중 자음을 기피하는 경향이 그렇다. 그러나 일부 비문에는 신시리아어 표기법이 발견되기도 하고 간혹 예외적으로 아랍어 문자가 시리아 문자 사이에 혼용되고 있으며, 고인의 무덤을 안식처라고 표기하는 문헌학상으로도 매우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필자는 마지막으로 무덤 새김글에서 발견한 시리아 동방교회의 십자가에 나타난 특징들을 다루면서 이것들의 전형이 되는 메소포타미아와 사산조 페르시아 동방교회의 십자가 즉 '나뭇잎 장식이 있고, 가지 끝에 세 개의 진주가 박혀 있으며, 3단 받침대'가 있는 독특한 양식의 십자가에서 시리아 동방교회 교인들의 신학과 신앙의 정체성을 추적해 보고 그 깊은 의미를 마음에 되새겨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