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미술계는 동양화의 정체성과 시대성 문제를 둘러싼 논의가 활발하였다. 당시 동양화는 때로는 서양의 추상 양식이나 재료를 들여와 현대성을 갖추기도 하고, 때로는 수묵과 채색 등 전통의 재료와 기법을 통해 동양 정신을 기반으로 한 정체성을 확립하려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시 동양화가 모색한 현대성은 여전히 한국의 현대미술로 인정받지 못했고, 동시에 무엇이 타당하고 합당하게 계승되어야 할 전통인지, 그리고 그 계승 방식은 어떠해야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합의도 도출되지 못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가속화 된 세계화의 흐름 속에 전통은 계승되기보다 해체되어야 할 대상으로 더욱 논의되었고, '탈경계', '확장'과 같은 논의 속에 동시대 미술을 참고한 한국화의 재료 기법 및 형식 방면의 개혁이 주로 추진되었다. 그 결과 21세기 한국화는 재료와 기법에 있어서는 혼합적이고, 표현형식과 내용에 있어서는 주로 초현실주의나 팝아트와 연관된 혼성적 장르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성은 일부 평론가들에 의해 21세기 한국화가 동시대 미술의 일부로 거론되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을 통해 한국화가 진정으로 타자의 위상을 벗어나 동시대 미술의 주체적 일원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러한 보편화가 21세기 한국화에 요구되는 최선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의가 분분하다. 최근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해 미술계와 학계의 주목을 받는 대표적인 화가로 황창배(1947-2001)를 꼽을 수 있는데, 그가 1970년대 말부터 2000년 무렵까지 보여준 역정은 한편으로 관념화, 형식화, 이데올로기화된 전통을 부단히 극복하는 동시에 전통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토대로 그것이 동시대 한국화의 문맥 속에 주체적이면서도 조화롭게 발휘될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탐색 및 제시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본 논문은 이러한 황창배의 생애와 작품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가운데, 황창배의 한국화가 가진 동시대적 특징을 규명하고자 한다. 더불어 그가 모색한 방식과 최근 21세기 한국화에 나타나는 전통 해체 방식을 모두 포괄하여 향후 21세기 한국화가 조금 더 주체적이고 풍성하게 발전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보는데 본 연구의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