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메를로-퐁티의 사유에서 가시성과 한 몸을 이룬 비가시성에 대한 탐구를 통해 규명되는 존재의 어둠(obscurité), 그리고 이러한 존재의 어둠에 가닿을 수 있는 반성의 양식으로 요청되는 침묵(silence)의 반성을 해명하고자 한다.
메를로-퐁티의 철학에는 일찍이 '애매성(ambiguïté)의 철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메를로-퐁티의 애매성은 이성의 빛에 의해 소멸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애매성은 사태가 근본적이고 궁극적으로 애매한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애매성이라는 사태의 발생적 차원에 주목하도록 한다. 메를로-퐁티의 사유에 나타난 '어둠' 개념은 애매성의 발생적 차원, 즉 발생이 근원적 혼돈과 심연 속에서 나타나며, 그 결과 우리들에게 모든 의미가 결코 고갈될 수 없는 풍요로움으로 나타남을 보여준다.
메를로-퐁티의 존재론의 중심 개념을 '어둠'으로 삼는 것은 그의 사유가 자신이 직접 기술하고 있는바 너머의 보다 포괄적인 기획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데카르트의 이분법적 사유를 주요한 대척점으로 하여 사유를 전개해 나가지만, 결국 서양의 고대철학으로부터 확립된 빛 중심적 사유의 전통을 해체하는 데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어둠의 사유는 사태를 자족적 실증성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있음/없음, 긍정/부정의 공존을 보지 못하는 빛의 형이상학의 한계를 드러내고, 불투명한 심연을 핵으로 펼쳐지는 부정성(negativité)으로서의 존재를 발견할 것을 촉구한다.
나아가 이러한 존재에 다가가기 위한 반성의 방법론으로서 '침묵'의 언어를 해명하는 것은 메를로-퐁티의 사유가 비단 사태와의 절대적 거리속에 밝히고 구분하는 방식으로 수행되었던 전통적 반성 양식을 비판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술에 근접하는 철학의 독특한 반성의 방법론을 탐색하고 이로써 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얼어 보이는 한층 더 실천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한다. 지금까지 메를로-퐁티 연구사에서 '반성' 개념은 좀처럼 주제적인 것으로 다루어지지 못했는데, 이것은 그가 신체적 실존의 '전반성적인 지대'를 다루는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전반성적인 것은 사실상 진정한 반성이 태동하는 지점이다. 이것은 그의 반성론의 주요한 목표가 철학적 반성 일반을 비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전반성적인 것과 분리되지 않는 철학적 반성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메를로-퐁티는 반성이 세계로부터 발을 뗀 관망자에 의해 행해져서는 안 되고 세계 속에 빠져들어 세계가 스스로 말하도록 하는 자에 의해 행해져야 함을, 그리하여 초월이 주관이 아닌 세계로부터 용출하도록 해야함을 역설한다. 그는 반성이 기존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언어가 세계로부터 떠오르도록 하여 세계가 그 침묵 가운데서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반성이 침묵 속에서 행해진다는 것은, 반성이 분절적이고 명증한 언어로 행해지는 것이기보다는, 세계와의 교제속에서, 수많은 행동들의 교차를 통해 간접적으로 행해지는 것을 이른다. 여기서 침묵은 '말 없음'의 부정적 사태나 완전한 침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를 사실적으로 발생시키는 무언의 배경, 명백히 규명될 수 없는 깊이로서의 사태를 가리킨다. 메를로-퐁티는 언어에 대한 발생적 이해를 통해 반성이 명석 판명한 관조의 신화를 넘어 오히려 침묵의 형태를 통해 충실히 수행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본 논문은 메를로-퐁티의 사유를 '어둠'과 '침묵'이라는 두 개념을 중심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메를로-퐁티의 사유가 플라톤이 암시하고 데카르트가 확립한 서양 전통 철학의 빛/어둠, 있음/없음의 존재론적 이분 법 내지 지성/감성, 명석(clara) · 판명(distincta)/모호(obscura) · 혼란 (confusa)의 인식론적 이분법을 해체하고, 철학이 이분법이 작동하기 이전의 보다 근원적인 지대를 해명하는 것으로 거듭나도록 함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목표 하에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전개된다.
첫째, 메를로-퐁티의 사유를, 현상학적 존재론을 통한 '어둠' 개념의 성립과 발전으로 재구성한다. 메를로-퐁티는 우리에게 현상하는 것을 파헤쳐가면서 그 이면의 비가시성의 존재를 발견한다. 이렇게 발견되는 깊이의 사태는 우리의 일상적 시선 속에서 공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가시적인 표면에 겹쳐진 비가시적 두터움이고, 현상하는 빛을 부양하는 존재의 어둠이며, 문화적 존재에 선행하는 야생적 세계요, 개시됨의 조건인 은폐됨이다. 메를로-퐁티는 이러한 존재의 실재를 '깊이', '움푹함', '주름', '간격' 등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공존을 보여주는 다양한 개념들과 함께 반복적으로 등장시킨다. 이것은 메를로-퐁티에게서 '어둠'이 그의 독특한 현상학적 존재론을 뒷받침하는 포괄적 은유가 됨을 보여준다.
둘째, 이러한 존재의 어둠에 다가가기 위해 고유한 반성론이 요청되며, 이것이 '물음'의 방법론으로 구체화됨을 살펴본다. 주체가 세계에 뿌리내린 채 수행하는 반성은 투명한 인식에 다다를 수 없다. 주체는 이러한 불투명성과 어둠으로부터 출현하면서 동시에 속해 있으므로, 사태 자체에 이르는 환원 또한 '완전한 환원의 불가능성'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반성이 세계에 뿌리내린 채 분기하는 신체적 반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철학이 예술과 한 몸을 공유하게 됨을 보여준다.
셋째, 존재의 어둠을 드러내기 위한 반성의 방법론이 메를로-퐁티의 예술론들에서 침묵의 반성의 단계적 발전 양상을 통해 구체화됨을 확인한다. 메를로-퐁티는 자신의 사유의 전 여정에 거쳐 철학과 나란히 예술론을 통해 '언어' 및 '감각'에 대한 발생적 이해를 심화시켜나가고, 이를 통해 반성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현상학 시기에 메를로-퐁티는 세잔이라는 한 예술가를 통해 끊임없는 '회의'와 함께 구체화되는 예술가의 작업에 주목함으로써 존재 발생 그 자체에 가닿는 반성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후 메를로-퐁티의 사유는 존재론적인 것으로 확장되게 되고, 그에 따라 예술론도 언어와 감각이라는 존재론적 발생의 문제에 보다 천착하게 된다. 그는 회화와 문학의 표현 수단인 '침묵'의 언어를 해명하는 한편, 발생적 존재를 기술할 운명에 놓인 철학 또한 '표현' 작업이며, 따라서 철학의 언어 또한 침묵적인 것으로서만 존재에 충실할 수 있음을 밝힌다. 나아가 후기 예술론에서 메를로-퐁티는 감각적 세계와 유리된 순수 정신으로 우리의 사실상의 가시성을 대체해 버렸던 데카르트주의를 체계적으로 비판하고, 정신과 분리되지 않은 눈을 재발견하고자 한다. 여기서 화가는 시각을 통해 존재의 발생을 목도하며, 침묵의 사태 속에 존재가 스스로 발화하도록 하는 자로 기술된다. 결국 메를로-퐁티의 예술론은 유일한 빛을 자처함으로써 철학적 사유의 권한을 특권적으로 점유했던 정신의 한계를 밝히고, 깊이와 두께 속에 현현하는 감각을 사유가 발생하는 원초적 지점으로 재발견하는 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