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에서는 남도 잡가<보렴>의 사설을 분석하여<보렴>의 기원과 노랫말의 특징을 밝히고, 사당패 소리였던<보렴>이 창우집단으로 수용되는 과정과 20세기 초 이후 판소리 창자들이 부르는<보렴>의 음악적 특징에 대해 구명하였다.
제II장에서는 <보렴>의 사설 분석을 통하여<보렴>의 사설이 삼남지역의 무가와 절 걸립패가 부르던 <고사소리>등 다양한 축원적 기능을 하는 악곡들과 사설을 공유하고 있음을 밝혔다. <보렴>이 경서도 사당패소리 <판염불>에서 기원했다는 선행 연구의 견해와 달리 <보렴>의 사설은 20세기 이전부터 남도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던 축원적 기능을 갖는 무가와 고사소리 사설 등이 어우러져 완성된 것이며, 이러한 특징을 갖는 이유는 <보렴>이 남도 사당패들이 부르던 <판염불>에서 기원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제III장에서는 20세기 초 판소리 창자들이 <보렴>을 수용하게 되는 배경을 살펴보았다. 전통사회에서 잡가로 취급되던 사당패소리 <판염불>을 판소리 창자들이 부르게 된 배경을 당대 공연 문화의 변동과 함께 살펴보았다. 그 결과 통속성을 추구한 남원협률사 소속 창자들이 1910년대부터 사당패의 <판염불>을 수용하여 <보렴>을 현행과 같은 음악적 특징을 갖는 곡으로 개작하여 부르기 시작했음을 알아내었다. 1920년대 이후에는 판소리 창자들이 남도잡가의 한 곡으로 <보렴>을 부르기 시작함에 따라 대중매체에 나타난 판소리 창자들의 <보렴>의 가창 양상을 유성기음반과 경성방송국 국악방송곡 목록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1920년대까지 <보렴>의 악곡명과 갈래 명은 정해지지 않았으나, 1930년대 이후에 <보렴>이라는 명칭으로 정착하여 남도 잡가의 첫 곡으로 부르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IV장에서는 20세기에 판소리 창자들에게 <보렴>이 수용된 이후<보렴>의 음악적 변화를 살펴보았다. 현행 <보렴>과 마찬가지로 중모리~자진모리의 장단 틀을 갖춘 최초의 음원은 남원협률사에서 활동한 김정문에게 소리를 학습한 이화중선과 그의 동생 이중선이 병창으로 1929년에 부른 <보념>임을 알 수 있었다. 1930년대 이후 <보렴>은 남도 잡가의 첫 곡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여류 명창에 의해 불러졌다. 1960년대 이후의 <보렴>의 음원은 박초선·한농선 창 <보렴>과 안숙선 창 <보렴>을 통해 살펴보았다. 20세기 후반기에 <보렴>은 남도 잡가화 되어 계면조화 현상에 따라 음원의 길이가 길어지고 다양한 시김새가 구사되는 양상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