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서유기』가 한반도에 수용된 양상을 탐구하고 조선의 사대부 지식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파악하는 것을 주된 관심사로 삼고 있다.
유교를 국가 이데올로기의 통치 수단으로 삼은 조선에서, 한문소설의 주된 독자층인 사대부 지식인들이 유교적 입장에서 심성론적 관점으로 『서유기』를 읽었고, 그것이 '마음'의 문제를 중시하여 창작된 조선 특유의 천군 서사에도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가설을 세워보았다.
『서유기』는 명·청 시대 사대기서 중 하나로 지금도 널리 애독되고 있는 장편 장회소설이다. 작품의 전체적인 내용은 삼장법사가 당 태종의 명을 받아 서천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는 도중 일행들과 함께 81난을 만나지만,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불경을 취하여 당나라로 무사히 돌아와 국태민안을 이루고, 일행 모두 불제자의 일원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무려 700년이나 전승되던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명나라 때 오승은이 첨삭 집대성하여, 현전하는 모습의 100회본 『서유기』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청나라에 와서는 명대 소설에 대한 평점본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대표적으로 도가적 성향의 평비를 행한 진사빈(陳士斌)의 『서유진전(西遊眞詮)』과 유가적 평비를 행한 장서신(張書紳)의 『신설서유기도상(新說西遊記圖像)』이 있다.
김태준의 『조선소설사』 이래로 『서유기』의 수용과 관련된 선행연구들은 대체로 조선의 한글소설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집중된 경향을 보인다.
고려 말기 지정(至正) 7년(1347년)에서 8년 사이에 간행되었다고 알려진 역관의 한어 학습서 『박통사(朴通事)』에 원대에 유통되던 고본『서유기』의 흔적이 남아 있어, 한반도에서 『서유기』를 읽은 유래가 고려시대까지 소급하고 있다는 점을 증언한다. 그만큼 한반도에서는 일찍부터 『서유기』가 수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에서 가장 많이 읽힌 것으로 추정되는 『서유기』판본은 진사빈의 『서유진전』이며, 원본 『서유기』를 읽은 사대부 지식인들의 독사 견해는 다양하게 나타났다.
『서유기』에 대한 공식적인 논평 기록은 조선 중기 허균(許筠, 1569∼1618)의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서 처음으로 찾아볼 수 있는데 『서유기』가 졸음을 쫓을 만한 책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연의소설류의 다양한 독서와 『서유기』 독서는 훗날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창작 하는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이다.
영조가 소설 애호가였음은 실록의 기록을 통해 여러 차례 이미 확인되었다. 구중궁궐에서 임금의 『서유기』 독서는 앉아서 서천을 다녀오는 여행의 즐거움과 유교적 입장에서의 마음 수양과 리더십을 공부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이 외에도 본인의 문집에 『서유기』를 짧게 언급한 사대부들로 이민구는 『서유기』가 허황되다고 하였고, 심재는 문체와 내용에 대해 극찬하였다.
유·불·도 삼교의 측면으로 『서유기』 수용양상을 보자면, 불교적인 측면에서 『서유기』는 『구운몽』과 같은 소설에 영향을 끼쳤고, 또한 『신설서유기도상』에 수록된 다양한 삽화는 불화(佛畫)에 영향을 끼쳤다 할 수 있다. 표충사본 <천수천안관음보살도>의 용왕 및 선재동자의 형상에, 『서유기』의 삽화로 등장한 용왕 및 홍해아의 특징이 뚜렷이 반영되어 있는 점이 확인되었다. 도교적인 측면으로 『서유기』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지명들 즉 동승신주 오래국의 화과산, 서우하주의 영대방촌산, 반도원 등등은 도가적인 신선의 나라를 연상케 하는 이름들이라 할 수 있다. 손오공의 72가지 술법과 저팔계의 36가지 술법 그리고 요괴들의 다양한 술법도 도가적인 특색이며 이러한 도가적인 면모의 수용은 한문소설 『삼한습유』와의 영향 관계를 추론케 한다. 유교적 측면으로는 『서유기』의 독자 유만주의 독서일기를 들 수 있다. 그의 일기 『흠영』에 따르면 유만주는 『서유기』를 통독하며 도가적 해석을 그다지 받아들이지 않고 "『서유기』는 『심경』의 외전"이라는 논평을 했다. 이는 유만주의 독서 심득(心得)이 공간을 뛰어넘어 장서신의 유교적 논평과 맞닿는 부분이다. 또한, 유만주의 이 정의는 『서유기』의 서사를 마음의 알레고리로 이해한 결과로서, 조선의 학자들에 게 마음 수양의 교과서로 잘 알려진 진덕수의 『심경』을 『서유기』의 주제와 연결시킨 것이라고 이해된다. 즉 유만주는 유교 이념에 익숙한 사대부 지식인 독자로서 『서유기』를 유교의 입장에서 이해했다 할 수 있다.
『서유기』가 마음을 다루는 이야기라는 평설(評說)은 청대 이전부터 있었는데, 『서유기』의 마음과 조선의 심성론적 '성(性)'과 '정(情)'의 긴밀한 관련이 해명되는 부분이다.
조선에서 마음을 중심으로 전개된 가전체 문학작품은 대표적으로 '천군소설(天君小說)'을 들 수 있다. '마음'을 의인화하여 '천군(天君)'이라는 주인공으로 삼아 창작된 서사인데, 조선에서만 형성된 특별한 장르이다. 천군을 소재로 한 조선 특유의 서사가 가진 이런 측면이 마음을 닦는 소설 『서유기』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17세기 조선의 천군소설을 대표하는 황중윤의 한문소설은 『서유기』의 소설을 그려내는 구성형식이 매우 흡사하며 이런 점에서 『서유기』가 한국의 한문소설 창작에 영향을 끼친 점이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