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에서는 중국과 한국의 한시(漢詩)에 나타난 여우의 형상을 비교하고자 했다.
중국 한시에서 선진(先秦)과 진한(秦漢)시대의 여우는 주로 자연생태와 여우가죽과 관련된 문화 형식으로 존재한다. 선진 시대에는 여우와 관련된 인명이 나왔고, 진한과 위진(魏晉)시대에는 여우와 관련된 변방의 지명으로 비호(飛狐)가 등장했다.
당대(唐代)부터 송대(宋代)까지 여우가 한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용법은 옛일을 회고하고 현재를 슬퍼하는 것이다. 이 시기에는 여우가 귀신이나 도깨비와 연루되어 초현실적이면서도 불길한 존재로 간주된 예도 점차 증가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여우는 악인과 악리(惡吏)를 풍자하는 시적 소재로서 자주 등장했다.
한국 한시에서는 나말여초 최치원(崔致遠)의 작품에서 "여우는 미녀로 잘 둔갑하고 / 살쾡이는 선비로 잘 가장하네"라 하여 여우가 미녀로 변신한다고 하는 설화적 상상력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최치원은 '호리'라 하여 여우와 살쾡이를 병칭하면서 들에 불을 놓아 이 동물들을 소탕하는 장면을 장쾌하게 묘사하기도 했다.
고려 시대에 접어들어 김부식(金富軾)은 "빈 집에 주인 없고 여우와 살쾡이만 있네"라 하여 중국 한시에서 익숙하게 나타나는 '狐狸'의 용법을 구사하였다.
이규보(李奎報)는 좀 더 독창적이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여우를 표현했다. 먼저 그는 무속을 타파하고자 쓴 시 「노무편」(老巫篇)에서 '수풀 아래의 아홉 꼬리 여우'라 하여, 척결의 대상이 되는 무당을 '구미호'(九尾狐)에 비유했다. 그는 대체로 여우에 대해 요사스럽고 비루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당시 고려 사람들의 일반적인 태도와 맞닿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규보는 늙어서도 시를 짓고자 노력하는 자신을 여우에 빗대기도 했다. 하루 종일 시 구절을 생각하느라 중얼거리면 사람들은 그것을 늙은 여우의 소리로 여겨 저마다 귀를 막고 피해 달아난다고 한 것이다. 이해받지 못한 예술가의 자의식을 그러한 비유로 드러낸 점이 독창적이다.
김극기(金克己)는 고려 농민들의 생활상을 읊은 시 「전가사시」(田家四時)에서 그들이 겨울에 여우를 사냥하고 그것을 식재료로 사용해 목숨을 부지하는 광경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이달충(李達衷)은 공민왕(恭愍王) 때의 요승(妖僧) 신돈(辛旽)을 여우에 빗대어 비판하는 시를 썼다. 당시 사람들이 신돈을 여우의 정령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이달충은 신돈의 악행과 죽음을 읊으며 여우와 관련된 여러 고사를 원용하고 여우에 대한 부정적인 통념을 가져와 일관된 태도로 그를 여우로 형상화했다.
안축(安軸)은 공무 중에 깊은 산골의 척박한 곳에 있는 송간역(松澗驛)에 머물며 황폐해진 그곳에 대해 "담장 뒤편에서 여우와 삵이 달려다니고, 또 문 앞으로는 꿩과 토끼가 지나다닌다"고 표현했고, 이 시어에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걱정하는 선비의 마음을 담았다.
이제현(李齊賢)은 중국에 체류하던 중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능을 실제로 답사하고, 이 인물에 대한 구양수(歐陽脩)의 역사 서술에 부당한 점이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측천의 능에서」(則天陵)라는 시를 썼다. 그 시에서 중국의 혼란한 정치상을 일컬으며 '여우와 토끼의 소굴'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중국과 한국은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전통을 공유하고 있으며 한문학의 측면에서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받아 온 역사가 오래다. 두 나라의 한시에 나타난 여우의 형상을 비교한 이 논문은 동아시아 차원의 비교문학 연구로서 의의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