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대사는 피와 눈물로 시작되었다.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에서 참패해 영국과 주권을 상실하는 치욕적인 난징조약을 맺어야 했다. 이때부터 중국은 독립 자주의 지위를 상실하고 반식민지로 전락해 마지못해 세계질서에 참가하여 근대사의 여정을 시작했다. 이어서 일련의 불평등 조약 체결로 서방 제국은 중국에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문화적 특권을 얻었다. 이와 함께 서양의 과학기술과 문화는 중국으로 대거 유입되면서 중국의 전통적 사회구조가 붕괴되고, 중국의 사회적 성질도 바뀌었으며, 중국 사회에서 유학의 권위도 위협받았다. 중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중국의 탈출구는 어디인가? 애국심을 가진 학자들은 중국의 마지막 활로를 모색하게 되었다. 기술적, 제도적 차원에서 시도하고 개량을 했지만, 내우외환의 중국을 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국내 정세가 급격히 악화되고 많은 인민의 고민으로 근대 중국인들은 개혁의 시각을 문화심리, 윤리적인 측면, 즉 중국 고유의 문화를 대표하는 유가 학설로 바꾸었다. 이런 특수한 역사적 배경에서 신문화 운동이 일어났다.
사실 19세기 말부터 일부 지식인들은 공자와 유학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일부 개선을 진행하여 공자와 유학의 위상이 흔들렸지만 대부분 효과가 없었다. 20세기 전반의 제도적 변화는 공자와 유학의 위상을 변화시켰다. 특히 1901년 청나라 정부가 추진한 '신정'은 객관적으로 중국의 근대화를 가속화시켰다. 1905년 과거제가 폐지되고 유학은 교육과 인재 선발 제도의 보장이 어려워지면서 독존적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북양 군벌의 통치 시기에는 사회가 어둡고, 정치가 부패하며, 민족의 위기가 가중되고, 봉건 복위의 역류가 갈수록 높아져서, 일부 민주주의 인사들은 이때의 중국이 사회·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었기에 사상과 문화의 부흥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민족이 각성하고 부흥하기 위해서는 사상문화의 철저한 대혁명이 필요했다. 이러한 사상문화 혁명을 위해서는 2000년 동안 공식 이데올로기로 존재해 온 공자의 사상이 혁명의 초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전통 유학은 공전의 위기를 맞았고, 강유위식의 기독교적 형식을 빌려 유학을 개조하려는 계획도 끝나게 되었다. 신문화운동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신문화운동에서 천두슈, 리다자오, 이바이샤, 우위, 후적 등으로 대표되는 문화 급진주의자들은 '민주'와 '과학'을 제창하고 "德先生"和"赛先生"을 옹호하며 중국에서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세우려 했다. 그들은 '민주'와 '과학'을 제창하고 "德先生"和"赛先生"을 옹호해야 중국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를 위해서 민주주의의 새로운 사상과 민주주의의 새로운 문화를 홍보해야 하고, 동시에 봉건주의의 낡은 사상, 낡은 도덕, 낡은 문화를 비판해야 한다. 봉건주의의 낡은 사상, 낡은 도덕, 낡은 문화를 비판하려면 공자가 대표하는 유가의 사상을 비판해야 한다. 천두슈 등은 강유위의 공교 운동과 봉건제제 복고를 반대하는 것을 기폭제로 하여 공자와 유가사상을 비판하였고, 공자와 유가사상을 비판하는 것에서 중국 전통문화 전체를 부정하였다. 그들은 유교를 삼강과 예교로 약화하고, 삼강과 예교가 유학의 전부라고 여겼으며, 예교를 사람이 먹는 것에 비유하였다. 하지만 유교 사상의 보편적 가치인 인학, 충서의 길, 오상 등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공자와 유학에 대한 문화 급진주의자들의 비판과 배제는 중국 전통문화를 크게 파괴했고, 사상 처음으로 중국 전통문화가 급격히 단절됐다. 특히 이 기세가 높은 문화운동에서 공자, 유학은 큰 타격을 입었고, 국민의 마음속에서 유학의 위상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이러한 대규모의 반전통주의는 다른 사회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다. 신문화운동으로 인한 사회의 변혁과 현대화 과정은 고대 유학의 도전이자 기회였다. 이는 유학이 문화 급진주의자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채찍질당하고 버림받은 동시에 객관적인 부분에서는 공자 사상의 재기를 부추겼다. 즉, 이 운동을 통해 전통적인 사회 제도, 가족 제도 및 사회적 습관의 연결이 해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문화운동의 영향으로 불상화된 공자가 사람들의 사상으로부터 희미해지기 시작했고, 서민적이고 진실한 공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공자를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고, 유학은 전통적인 형태에서 현대적 형태로 이행하게 되었다.
신문화운동 이후 문화 급진주의자들과 문화 보수주의자들은 중국과 서양의 문화 문제, 중국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유학이 중국을 살리는 임무를 담당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벌였고, 중국과 서양의 문화 논쟁, 신일 문화관의 논쟁, 과학과 현학의 논쟁 등이 이어졌다. 논쟁이 계속 심화됨에 따라 문화 급진주의자와 문화 보수주의자들은 결국 중국 마르크스주의, 자유주의 서구화파, 현대 신유가 3대 사조로 분화되었다. 이 3대 사조가 서로 대립하고 서로 보완하면서 20세기 중국 사상 학계의 삼조정립의 양상이 형성되었다. 그중 현대 신유가학파는 유교 사상의 고수 및 재건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는 신문화 운동 이후 유학 발전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고 현대 신유가는 20세기 유교 발전을 촉진하는 주요 힘이 되었다.
현대 신유가의 대표들은 현대 서양문화를 참고로 하여 유학을 부흥시키자는 취지로 유학을 재해석하여 유학을 새롭게 발전시키려 하였다. 이들은 반성, 융합, 업데이트를 통해 중국 전통의 낡은 사상에 대한 현대적 전환을 시도했고, 새로운 관점에서, 철학적인 측면에서 유학을 이성적으로 해석하려 했다. 그들은 유학의 사상 자체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공자의 인생철학을 주목하여 공자 인생철학을 되살리는 방법으로 유학을 부흥시키고, 나아가 유교 문화에서 중국 문화 발전의 내적 사고를 드러내 중국 문화의 미래발전 구성을 희망했다.
1세대와 2세대, 그리고 3세대까지 이어진 현대 신유가 학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20세기 초부터 21세기 초까지 100년 동안 유학은 중국 본토에서 형성, 발전, 침묵, 재귀, 전면 부흥을 이루었다. 특히 21세기에 들어 유학의 씨앗이 다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며 생기를 불어넣는 모습은 학문 분야에서 지식인들의 유학에 대한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구성뿐만 아니라 민간 대중들 사이에서도 보이게 되었다. 민간 유학, 대중 유학, 시골 유학 등의 부흥으로 유학은 다시 중국인의 일상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