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의 조각예술에 나타난 원시미술에 관한 연구이다. 자코메티는 현대조각의 3대 거장으로서 실존주의 미술을 전개한 예술가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에는 원시미술의 특징인 형태의 단순성 · 생명성 · 추상성 · 종교성 등이 나타나 있고, 그의 평생 과업인 비쩍 마른 인간 조각상에는 불완전한 인간 존재의 실존주의가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원시미술(原始美術, Primitive Art)은 역사시대 이전의 선사시대 미술이나 원시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부족의 미술을 말한다. 원시미술은 가축과 농업이 이루어지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좀 더 구체적인 형태와 내용을 갖춘 새로운 미술로 대체되었다. 원시미술의 보고(寶庫)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아프리카 대륙이다. 미술가의 원시 문화 및 미술에 대한 관심은 서구의 식민지 확장의 역사와 함께 나타났다.
20세기 들어 유럽의 미술계는 원시미술에 영향을 받아 야수파, 입체파 등의 새로운 아방가르드 양식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현대미술의 토대가 되었다. 그 단초를 제공한 미술가는 모계가 잉카제국의 후손인 프랑스의 후기인상파 화가인 폴 고갱이다. 고갱은 1891년에 남태평양의 타히티(Tahiti)로 떠나 유년기와 청년기에 접했던 원시 부족 문화를 직접 체험하면서 그곳 풍경과 인물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그의 대표작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1897)에는 원주민 조각상에 따온 석상. 페루에서 발굴된 미라를 참고한 노인 등의 원시미술 영향이 나타나 있다. 1906년 고갱의 회고전이 개최되고, 민속 박물관에 원시미술이 대거 전시되면서 마티스·피카소·드랭·블라맹크·클레 등의 화가와 브랑쿠시·무어·자코메티 등의 조각가가 원시미술에 영향을 받아 독창적인 작품을 창작했다. 이들 중 조각가들은 현대조각의 3대 거장으로 유명하다. 특히 자코메티는 로댕의 조수였던 부르델에게 조각을 직접 배웠으나, 그를 포함한 현대조각의 3대 거장은 로댕과 부르델이 추구한 사실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추상적인 조각을 지향한 차이를 보였다. 그 근원은 어려서부터 보았던 원시미술에의 감동과 영향이었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양차 대전을 겪으면서 인간의 잔혹성과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를 고민하면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결론을 발표했다.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곧 인간의 주체적 삶을 의미한다. 신이 없는 세계에서 인간은 신과 무관하게 스스로 존재 이유와 의미, 가치를 만들어간다. 이러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을 가장 잘 반영한 예술가는 자코메티다. 자코메티는 사르트르와 매우 친했으며, 사르트르는 자코메티의 작품에 대한 글도 여러 차례 썼다. 사르트르가 주창하고, 자코메티가 예술로 구현한 실존주의는 인간이 그 존재의 완전하지 않음을 각성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라는 철학이었다.
실존주의 관점에서 보면, 자코메티의 평생 과업인 비쩍 마른 인간 조각상은 불완전한 인간 존재를 훌륭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자코메티의 작품은 현대인의 고독에 내재한 진리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자코메티는 "예술도 관심이 있지만, 진리에 더 관심이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자코메티의 조각 작품에 나타난 고독은 사르트르가 말한 자유로움을 전제한다. 홀로 있음은 역설적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자코메티는 1901년 스위스와 이탈리아 국경 근처 고산지대의 산간마을 스탐파(Stampa)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야수파 화가 아버지의 영향과 도움으로 미술을 공부했으며, 조각가가 되었다. 그는 1920년 5월, 아버지를 따라서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과 그 이전 고대 이집트 및 로마의 미술에 깊이 감명받았다. 그는 1921년 가을에 함께 다시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네덜란드 출신의 노신사의 죽음을 직접 겪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고, 이때의 경험은 훗날 그의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자코메티는 1922년 1월, 아버지의 권유로 그랑쇼미에르 아카데미 등록해 부르델에게 조각을 배웠다. 1926년부터 아프리카 미술과 오세아니아 조각등 원시미술과 앙리 로랑스, 자크 립시츠 등의 영향으로 입체주의 조각을 시도하면서 살롱 데 튈르리에 출품했다. 1932년, 자코메티는 파리의 피에르콜레 화랑에서 생애 최초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1933년에는 같은 화랑에서 열린 '초현실주의 작가 전시회'에 참여했다. 그는 1949년에 스위스 국제 적십자사 경제 국제기구에 근무하던 여인 아네트 아름(Anette Arm)과 결혼했다.
자코메티는 1955년에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었고, 1956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의 기념비적인 여인상들을 출품했다. 이어 베를린의 아트홀에서 대규모의 개인전을 가졌다. 자코메티는 1966년 1월 11일, 과로로 인한 심장발작으로 쓰러져 65세의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자코메티의 작품은 초기에는 자연 주의적 제작 태도를 지닌 아버지의 작품과 교육의 영향을 받아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고대 이집트와 원시부족 미술에 영향을 받아 조각에 채색하는 작품이 주로 이루어졌다. 그는 '모사(摹寫)가 대상을 진실로 그려내는 최고의 수단'으로 생각해 대상의 재현에 몰두하면서도 이에 한계를 느끼고 기억과 상상에 의한 창작을 시도하다가 그에 문제를 느껴 다시 재현과, 기억 및 상상에 의한 창작을 평생 반복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이러한 창작 태도의 변화와 맞물려 전개되는데, 형태적으로는 '납작한 조각'과 '길쭉한 조각' 두 가지 양식적 특징을 보인다. 이들 양식은 모두 원시미술 및 고대 미술에 영향을 받았으며, 내용적으로는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 같은 실존주의적 특징을 보인다.
첫째, '납작한 조각'은 1925년부터 1932년까지 주로 이루어졌는데, 다시 입체주의 조각과 추상 및 초현실주의 조각으로 나눌 수 있다. 입체주의 조각은 세잔의 '자연물은 원통·원뿔·구(球)로 환원된다'는 이론에 따라 사물의 형태를 해체해 여러 시점에서 본 모양으로 재조립한 입체주의에 영향을 받아 1926년에 제작한 작품이며, 추상적 조각은 1927년 파리 장식 박물관에서 보았던 아프리카 단 부족의 목제품 〈숟가락〉에서 영향을 받아 납작하고 단순하게 표현한 〈숟가락 여인〉과 〈연인〉에서 시작되어 고대 그리스의 키클라데스 조각에서 영향을 받은 〈토르소〉 〈응시하는 사람의 두상〉 〈나무로 만든 새장〉 〈매달린 공〉 〈오전 4시의 궁전〉 등으로 나타났다.
둘째, '길쭉한 조각'은 1932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진행되었는데, 납작한 조각의 후기에 등장하는 기둥 같은 긴 선적(線的)인 형태의 초현실적인 작품에서 출발한다. 〈마네킹〉 〈걷는 여인〉 등 추상적이면서도 길쭉한 조각을 거쳐 〈가리키는 남자〉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뒤 〈숲〉 〈전차〉 〈광장〉 〈기아에 허덕이는 개〉 등의 작품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셋째, '표현주의적 조각'은 1950년대 중반부터 기억이나 상상을 바탕으로 작품을 제작하던 태도에서 벗어나 실제 인물을 모델로 사생하면서 반신상에 등장한 마지막 시기의 양식이다. 작은 얼굴에 거친 표면이 특징으로 길쭉한 조각에서 볼 수 있는 실존주의적 감정이 배가되는 특징이 있다. 초기 르네상스 조각가인 도나텔로의 조각 〈참회하는 막달레나〉를 연상시키는 〈서있는 누드〉에 처음 나타나기 시작해 〈안네트의 흉상〉 〈스웨터를 입은 디에고〉 〈야나이하라 이사쿠의 흉상〉 〈로타르 3〉 등의 작품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자코메티는 브르통의 독선에 반발해 초현실주의와 결별한 뒤 아버지와 부르델이 강조한 사생에 의한 창작에 다시 몰입하면서 그만의 가늘고 긴 인체미학을 확립하게 되었다. 뼈만 앙상한 몰골의 그로테스크한 그의 인체 조각은 뛰어난 독창성으로 인해 미술계로부터 주목을 받았고, 실존주의 철학의 대부인 사르트르에게 '실존주의 미술가'로 인정받았다.
자코메티는 자신의 창작활동에서 초기부터 말기까지 원시 및 고대 미술에 많은 영향과 영감을 받았다. 그 정수가 '실존주의 미술'로 평가되는 가늘고 긴 인체 조각이다. 이를 통해 자코메티의 삶과 예술, 나아가 현대인의 실존을 이해할 수 있다. 본 연구가 학술적 의미와 함께 연구자 자신의 성찰과 미래를 위한 설계에도 도움이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본 연구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미흡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좋은 연구가 있으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