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다원화된 사회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는 '타인'의 고유한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아서, 즉 각 개체의 다양성을 존중하기보다 쉽게 주변화 함으로써 발생한다. 19세기 말에 프리드리히 니체가 그의 저서 『즐거운 학문 Die fröhliche Wissenschaft』(1882)에서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과 함께 더이상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포한 지도 한 세기가 훌쩍 넘었다. 또한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 Surveiller et punir: Naissance de la prison』(1975)에서 지식을 창출하는 것이 권력과 지식의 상관관계에 달렸음을 규명해낸 지도 오래되었다. 규범적인 담론체계 내에서 말할 수 있는 존재와 쓸 수 있는 존재는 바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일컫는다. 오늘날 절대적 가치를 둘러싼 굳은 믿음도 거의 무너졌다. 그러나 사회적 일상 속의 사람들에게 '정상성'은 여전히 절대적인 진리처럼 작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각 개인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정상성의 경계 밖으로 나가게 되면, 비정상으로 낙인찍히기 쉽다. 그렇기에 '정상성'과 같은 사회문화적 규범이 자아 정체성 형성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적지 않다.
이 연구는 파트리크 쥐스킨트 Patrick Süßkind의 『향수 Das Parfum』(1985)에서 드러난 중심인물의 정상성 모방과 자아 정체성 수행 및 은폐 전략 문제를 논의에 부치고 있다. 비교적 최근의 독일 소설로서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부제와 함께 발표된 『향수』가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이유는 흥미로운 줄거리뿐만 아니라, 소설이 담고 있는 문제성이 다양한 관점에서 다뤄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향수』에 대한 선행연구들에서는 계몽주의 비판, 상호텍스트성 분석 등과 함께 이 작품을 포스트모더니즘 관점에서 특히 교양소설이나 역사 소설의 패러디로 분석해왔다. 본고는 이성 중심적인 계몽주의의 정상성 담론을 비판하는 관점에서 소설 속에 나타나는 사회적 소수자이자 반-영웅인 중심인물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의 정상성 모방과 정체성 수행 및 은폐 전략을 분석하고, 그런 전략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도출하는 데 목적을 둔다.
『향수』에서는 이성‧시각 중심적인 사회에서 열등한 감각으로 치부되어 온 후각을 이용하여 '자신의' 새로운 정상성을 제시하려는 인물이 등장한다. 기존 사회에서 자신이 수용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그는 스스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짜 정체성을 표방하며 기존의 질서를 따르는 척하는 인물이다. 그는 시각‧이성 중심적인 18세기 서구 사회에서 자신의 후각적 능력을 도구 삼아 사회적 규범의 경계를 넘고자 시도하는 과정에서 가짜 정체성을 만들어, 이를 가면처럼 쓰고 사회적 규범에 속하는 '정상적인' 인물처럼 행세한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후각 능력으로 사회적 권력을 (재)구축하려는 목표에서 파생된다. 이로써 그의 삶은 기존 사회의 규범으로서의 정상성을 표면적으로 수행하는 동시에 기존 권력의 파괴를 시도하는 것으로 점철된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 내지 목적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순간에 정상성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폭로할 뿐 아니라 자신 또한 해체를 맞이하게 된다.
그루누이가 비이성‧비정상성을 내포하는 인물이라면, 그와 달리 이성‧정상성을 대변하는 인물들이 권력자들로 등장한다. 이들은 사회적 명예를 지니고 있는 자들로서, 생존을 위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자 투쟁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들의 사고와 행동은 매우 자의적이고 불합리하며, 심지어 반-영웅이자 범죄자인 그루누이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드러낸다.
그루누이의 생존을 위한 시도 과정에서 네 가지 특징이 드러난다. 첫째, 규범적인 '정상성'은 개인의 자아 정체성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둘째, 정상성 이데올로기는 '정상'에 포함되지 못하는 타자를 삶의 중심에서 배제하고 지속적으로 희생시킨다. 셋째, 통상적인 규범은 정상성에 부합하는 듯이 가면을 쓰고 정체성을 은폐하는 자들 모두를 가려낼 만큼 촘촘하지 않다. 넷째, 결국 '정상성'이란 사회적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규범일 뿐이기 때문에 견고한 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쥐스킨트는 주인공 그루누이를 통해 사회적 정상성을 모방함으로써 '수행적인 performative 정체성'을 구성하는 '타자'의 전략을 그려내고 있다. 그루누이는 '패싱'을 전략으로 삼아, 꾸며낸 정체성을 시각적 가면 및 후각적 가면을 이용하여 수행한다. 패싱은 한 개인이 자신의 본질적인 정체성을 변장으로 은폐하고, 규범적 정상성이 그어놓은 경계를 넘을 수 있게 한다. 그루누이는 가면을 쓰고 사회적 정상성을 따르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기존의 권력이 만들어 놓은 배타적인 규범의 경계를 교란하고 있다.
이처럼 『향수』는 단순히 18세기 서구의 계몽주의와 도구적 이성주의의 비판이라기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정상성' 담론에 의해 야기되는 여러 문제들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큰 시의성을 띠며, 앞으로 더욱 다양한 관점에서 토론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