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이 직면하는 세 가지 측면을 대지(site), 프로그램(program), 그리고 재현(representation)으로 요약한다면, 그중 프로그램은 명료하게 정의할 수 없는, 해석에 따라 다중적인 건축의 형태를 결정하는 관념적 실재라고 할 수 있다. 건축에서 프로그램이라는 용어는 18세기에 등장하는데, 이후 근대건축에 이르기까지 '기능'의 의미가 짙었다. 특히 합리주의적 사고를 근간(根幹)으로 하는 근대 건축에서는 기능의 해결을 건축의 필수적인 과정으로 간주하고 합리적 사고에 의존하여 새로운 형태의 논리를 기능에서 찾고자 했다. 그러나 기능으로부터 건축의 형태가 나타나는 양상의 가장 큰 위험은 어떻게 형태를 기능(프로그램)에 최적화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행위가 수반된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러한 행위는 프로그램을 대체하다시피 한 기능에 관한 연구가 아니라 형태에 관한 디자인이며, 프로그램과 관련한 공간과 형태의 구성을 고착화하고 획일화했다.
근대 이후 도시와 사회가 복합화 되어감에 따라 단일하고 고정된 프로그램만으로는 현대 건축을 재현할 수 없게 되었다. 건축이 인간의 다양한 삶의 패턴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게 되자 건축과 도시에서 프로그램에 대한 재성찰이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건축가는 기능과 형태의 게임을 벗어나서 그 이상의 것을 결정하고 재해석해야 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특히 불확정적인 현대사회와 헤테로토피아적 도시구조의 특성상 건축에서 프로그램은 연결과 복합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건축가는 프로그램을 통해 무엇을 이룰 것인가에 관한 범위를 스스로 설정해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제 형태를 주관하던 기능(프로그램)은 건축가의 의도(purpose)를 따르게 된 것이다. 건축가의 의도란 다시 말하면 건축가의 입장이며, 이는 여러 가지를 포함하는데 넓게는 문제의 본질을 파악해내는 작업부터 문제를 설정하는 것, 좁게는 건축의 콘텐츠에 관한 선택에까지 미친다. 이러한 연유로 건축가는 형태와 형식, 장르를 초월하여 자신의 역할과 프로그램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하며, 때때로 영화적 기법을 사용하거나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하는 기법을 사용하는 등의 전술을 시도한다. 허구 혹은 사실에 근거하여 만들어낸 완결된 서사를 전달하는 내러티브(narrative)를 구축한다거나 열린 불확정성, 상호작용성에 반응하는 스토리텔링(storytelling)으로 프로그램에 대한 사용자의 개입을 극대화하는 최근 사례가 이를 입증한다.
이러한 상황에 근거하여 이 연구는 서사학에서 사용하는 내러티브와 스토리텔링의 개념을 바탕으로 현대 건축 프로그램에 관한 재해석과 콘텐츠 구축의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요컨대 내러티브가 작가가 제안하는 하나의 전문적인 문학적 서사의 틀로 작용한다면 스토리텔링은 대중이라는 수용자를 전제로 하여 상호작용하는 대중적 문화콘텐츠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이 연구에서는 내러티브적 접근이 대지의 콘텍스트를 프로그램과 연결해주는 하나의 틀을 설정하여 완결된 이야기를 사용자에게 전달하며, 스토리텔링은 이용자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불확정적인 건축을 재현하는 것이라는 가정을 통해 이 두 가지 접근을 구체적으로 고찰할 것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새로운 건축이 건축의 외적 요소뿐만 아니라 질료(matter)라고 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부터 형성된다는 가정 아래, 관련된 다양한 사례의 분석을 통해 내러티브와 스토리텔링의 특성을 고찰하며, 오늘날 건축에서 내부적 논리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프로그램의 역할을 결정하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