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치세는 사후평가(hindsight) 방식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에 관한 연구는 당대의 사건과 그의 태도 변화에 더 큰 관심이 집중되어야 한다. 아우구스투스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는 기원전 23년으로, 이 시기에 아우구스투스는 정치적, 개인적으로 큰 위기를 맞이한다. 이때 겪은 사건으로 인해 그는 커다란 심경변화를 맞이했다. 그가 심경변화를 겪고 권력 강화를 시도할 때, 그의 정치체제 변화를 도운 것은 당시에 정치적으로 성장한 '도시 평민(plebs urbana)'이었다. 본고에서는 기원전 23년 아우구스투스의 정치 위기와 도시 평민의 정치적 성장이 어떻게 국가 경영의 기본 원칙을 변화시켰는지에 대해서 고찰해 보았다.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의 회복(Res publica restituta)'을 선언했다. 그는 공화정의 회복 선언으로 그가 가진 특권을 원로원에게 돌려주어 공화정의 질서를 회복했으며, 원로원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와 여러 권한을 수여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이 시기에 받았던 권한들은 전부 공화정의 선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여러 차례 집정관에 오른 것과 총독의 군사명령권(imperium proconsulare)을 수여 받아 속주를 관리한 것은 그의 직전에도 사례가 있었던 것들이었다. 또한, 그의 영묘(Mausoleum Augusti)를 비롯한 상징물들을 바라보는 관점은 당시 공화정 귀족들 사이의 공직에 대한 경쟁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3년 이전에 취한 정책 중 앞선 사항들과 다른 성격을 지닌 것은 후계자 문제였다. 아우구스투스는 그가 후계자로 생각한 마르켈루스의 승진과정에 개입했고, 자신의 권한을 물려주고자 했다. 그가 가진 권한과 태도는 일인정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에, 이로 인해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3년에 공화정 귀족들의 커다란 저항을 겪게 되었다.
기원전 23년 아우구스투스는 프리무스 재판에 연루되었다. 원로원 속주의 총독이었던 프리무스가 원로원의 허가 없이 국경을 넘어 공격해 반역죄 법정에 섰던 사건이었다. 그는 법정에서 아우구스투스와 마르켈루스의 승인으로 전쟁을 했다고 증언함으로써, 아우구스투스의 정치 위기를 초래했다. 둘에게는 원로원 속주의 전쟁 승인권이 없었고, 아우구스투스는 자발적으로 법정에 나와 해명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가 법정에 섰던 것만으로도 그는 정치적 평판에 피해를 보았다. 그에게 정치적으로 위협이 되었던 프리무스 재판이 끝난 뒤,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목숨을 노리는 암살모의를 겪어야 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암살 모의가 그에게 더욱 치명적이었던 이유는 주모자 중 한 명인 무레나가 그와 가장 가까운 가문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암살모의는 사전에 발각되어 주모자들은 모두 처형되었으나, 아우구스투스의 지지세력은 신뢰가 깨지며, 세력 약화를 겪어야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3년에 중병에 걸렸다. 비공식적인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는 마르켈루스였으나, 앞선 위기들의 결과, 그는 따로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았다. 대신 원로원 의원들과 기사들을 자신의 근처로 불렀고, 그들 앞에서 동료 집정관이었던 피소에게 국정 문서를, 그의 동료였던 아그리파에게는 자신의 인장을 넘겨주었다. 이는 이전까지 그의 후계자가 마르켈루스라는 시선을 부정한 것이었고, 그의 사후 공식적으로는 원로원에게 권력을 반납하고, 비공식적으로는 아그리파가 자신의 후임이 될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건강을 회복했고, 그의 후계자 논쟁은 마르켈루스가 병사하면서 일단락되었다.
기원전 23년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아우구스투스는 이전과 생각이 변화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전과 달리 공화정 전통 내에서 가질 수 있었던 것,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장기간 맡아왔던 집정관직을 사임한 대신, 종신 호민관의 권한(tribunicia potestas for life)과 대(大)군사명령권(imperium porconsulare maius)을 수여 받았다. 그에게 주어진 종신 호민관의 권한은 도시 평민과 원로원의 대립구조를 이어받아 그에게 도시 평민을 대표하는 위치를 부여하면서, 그의 정치적 태도 변화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는 이후에도 도시 평민의 지지를 공고히 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한다.
아우구스투스가 집정관에서 물러나 동방 속주로 떠난 기원전 22년 로마에서는 곡물 위기가 발생했다. 원로원이 곡물 위기에 무능하게 대처하자 도시 평민들은 아우구스투스에게 곡물 위기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아가 그를 다시 부르기를 요구하며 폭력적으로 원로원을 협박했다. 도시 평민들의 권력이 강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이 사건으로 결국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여러 권한을 제시하고 돌아와 줄 것을 간청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의 제안 중 곡물공급위원직(cura annonae)만을 수용하며 로마시의 곡물 위기를 해결해 주었다. 그가 로마시의 곡물공급을 담당하며 확보한 도시 평민의 지지는 그가 권력을 강화해 나감에 있어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제공하는 역할을 해주었다.
이 시기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를 후계자로 삼고, 율리아와 결혼시키며 자신의 가문이 계속해서 권력을 가질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기원전 19년 도시 평민의 지지를 받던 또 다른 인물인 루푸스가 정치적 소요를 일으켰을 때, 소요를 수습하기 위한 원로원의 비상결의로 로마시에 돌아왔다. 그가 돌아왔을 때, 원로원은 종신 집정관의 명령권(imperium consulare for life)과 감찰관의 권한(censoria potestas)을 수여했다. 그는 이를 통해 공화정 시기 여러 공직에 나뉘어 있던 주요권한들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게 되었고, 기원전 18년 원로원 개혁을 통해 자신의 가장 강한 견제 세력을 장악했다.
결과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정치체제 변화는 기원전 23년 아우구스투스가 정치적, 신체적 위기에 빠짐으로써, 정치적인 반발과 견제, 신체적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변화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원전 23년 이전까지 그는 공화정의 선례 아래에서 권한을 취했다. 그러나 기원전 23년의 위기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반대파의 견제에 대항하기 위해서 공화정 시기의 권한 이상의 것을 추구했고, 그 권한에 대한 명분은 아우구스투스의 곡물정책 등을 통해 그의 지지 세력이 되어준 도시 평민이 제공했다. 도시 평민의 지지로 그의 권한은 차츰 축적되었고, 결과적으로 모든 권한이 아우구스투스에게 모이게 되었다. 이로써 공화정이 막을 내리고 원수정이라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