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은 괴테시대라 불리는 1750년대에서 1830년대 사이에 일어난 독일 신인문주의를 가리킬 때 자주 언급된다. 여기엔 계몽주의와 내면을 추구한 독일 전통 그리고 고대 그리스 로마 이래로 전수된 서양의 인문주의를 융합한 근대의 전인교육의 이상이 담겨있다. 독일의 교육받은 중산층 교양 계급의 문화적 에토스로서 제도와 관습 그리고 타인의 견해를 무조건 따르지 않고 자유와 고독을 통해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이었다. 한 마디로, 교양은 근대의 독일문화가 지향하고자 했던 핵심적 가치를 드러내는 용어였던 것이다.
하지만 교양은 특정한 문화적 유산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바로 고대 그리스였다. 독일 교양을 정초한 칸트와 헤르더 그리고 훔볼트는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물었던 교부 테리툴리아누스의 질문을 역전시켜 고대 그리스는 높이고 타문화와 종교, 특히 유대인/교는 경멸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것은 전통적인 종교적 반유대주의가 신인문주의 시대에 문화를 등에 업은 인종·문화적 반유대주의로 전화(轉化)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편적 인류애를 추구한 계몽주의 교양조차도 유대인/교에 대한 전통적인 종교적 반유대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셈이다. 불행히도 낭만주의 시대에는 더욱 심화되었는데 윌리엄 존슨의 인도-유럽어의 발견과 나폴레옹의 독일 침략으로 배타적인 인종·민족주의적 성향을 띠었다. 후대의 생물학적 인종차별주의자들과는 달랐을지라도 슐레겔을 비롯한 독일의 중산층 교양 계급들은 영국 및 프랑스와 유대인/교를 배격해야 하는 타자로 간주하는 인종·민족주의적 태도를 취했다. 이것은 계몽주의 교양의 인종·문화적 반유대주의가 낭만주의 교양의 인종·민족주의적 반유대주의로 변모해갔다는 것을 뜻한다.
독일 교양의 이러한 발자취는 본 논문이 고찰할 슐라이어마허에게서도 드러난다. 특히, 『예수전』 은 이 발자취의 정점이었다. 하지만 『예수전』 에는 『종교론』 과 『해석학과 비평』 의 흔적이 나타나기에 『종교론』 과 『해석학과 비평』 을 빼놓을 수 없다.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을 위한 강연'이라는 『종교론』 의 부제(副題)가 알려주듯 슐라이어마허가 종교를 성찰하는데 있어 독일 교양을 진지하게 고려했다는 것이 『종교론』 만큼 잘 드러나는 것은 없다. 그렇기에 독일 교양처럼 유대인/교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여기에 스며있는 것은 자연스럽다. 기독교는 독일 교양의 이상에 걸맞은 종교로 변모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유대교는 기계적이며 사멸한 문자의 종교에 불과했다. 죽이는 것은 문자요 살리는 것은 영이라는 전통적인 기독교적 이해가 낭만주의 교양의 유기체적 이해와 만나 타자의 종교인 유대인/교를 하대하는 인종·문화적 반유대주의가 『종교론』 에 깔려 있었던 셈이다.
『해석학과 비평』 도 이 같은 이해의 연속으로 보인다. 한 예로 천재로서 저자 개념을 들 수 있다. 낭만주의 교양에서 신적인 위치로까지 격상된 천재는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자신의 이해를 텍스트에 펼치는 인물이었다. 이것은 텍스트가 저자 이외의 타자나 타문화에게서 온 인용들의 짜임이 아니라 저자의 독창적인 정신의 산물로 다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텍스트의 이해나 의미는 오로지 저자를 파악하는데 달려 있었던 것이다. 『해석학과 비평』 도 마찬가지였다. 저자중심의 낭만주의 해석학을 주장한 슐라이어마허에게 신약은 천재로서의 저자들이 생산한 것이며 타자인 구약은 신약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은 문헌으로 취급되었다. 전통적인 이해에서 신약은 구약과 연속성을 갖는 문헌이었지만 이제 신약은 구약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독창적이고 독자적인(Sui Generis) 문헌으로 도드라지게 되었다. 반면에 구약은 경전에서 배제되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구약에 대한 이 같은 취급은 『종교론』 에서 유대인/교를 사멸한 문자의 종교로 취급한 것과 다를 바 없다. 보편적인 종교적 관심이 쇠퇴한다면 해석학적 관심도 사라진다는 그의 말은 이 점을 확인시켜준다. 물론 구약의 배제가 종교적이고 해석학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경전뿐만 아니라 독일의 문화적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구약이 점차 쓸모가 없어져가는 세계에 처한 슐라이어마허의 고민이 녹아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구약에 대한 독일 교양 계급의 부정적 이해를 극단으로 끌어올려 신약만으로도 기독교가 견고하게 설 수 있다는 것을 변증하고자 했던 것일까.
어쨌든 『종교론』 과 『해석학과 비평』 에 나타난 유대인/교와 구약에 대한 부정적 이해는 『예수전』 의 예수 이해에도 영향을 끼쳤다. 한 예로, 예수가 유대의 환경으로부터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고 스스로 깨달음으로써 하느님의 계시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명도 이해했다는 『예수전』 의 주장에서 『해석학과 비평』 의 독창적인 천재로서의 저자 개념을 떠올릴 수 있다. 아울러 예수가 구약에 묘사된 예언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는 것에서 『종교론』 의 문자에 대한 하대, 즉 목소리에 대한 선호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한다. 『예수전』 이 『종교론』 과 『해석학과 비평』 에 나타난 이해들을 아무런 수정 없이 그대로 차용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천재로서의 저자 개념과 문자에 대한 하대가 당대 독일 교양 계급이 열광했던 인종·민족주의적 관점과 뒤섞여 예수에게 투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전』 에서 예수가 상황에 지배받기보다는 상황을 지배하는 소위 민족주의가 선호한 천재적인 영웅적 인물로 묘사된 것은 이 점을 보여주는 예이다. 더구나 슐라이어마허는 독일 민족주의에 투신한 설교자였을 뿐만 아니라 독일 민족주의자들이 선호했던 요한복음서를 예수를 이해하는 최상의 복음서로 간주하기도 했다.
물론 『예수전』 의 예수 이해에 라이마루스에서 슐라이어마허까지 이어진 예수 생애 연구의 궤적을 빼놓을 수 없다. 예수 생애 연구사를 훑다보면 라이마루스의 유대인 예수상이 레싱을 거치면서 소실되고 그 소실된 자리에 계몽주의의 보편적 인류애가 그리고 슐라이어마허에 이르면 독일의 인종·민족주의가 들어서게 되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이것은 레싱의 비유대인 예수가 슐라이어마허에게 일정 부분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레싱이 계몽주의의 보편적 인류애를 위해 유대인 예수상을 소거한 마당에 독일 인종·민족주의를 위해 슐라이어마허가 유대인 예수상을 소거하지 말란 법은 없다. 불행히도 슐라이어마허의 예수를 도그마적인 이해라고 격렬하게 비판한 슈트라우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더욱 심화되었다. 슈트라우스의 신학적 작업은 슐라이어마허의 『예수전』 이 예수에 관한 객관적인 역사적 전기가 아니라 기독교의 특정한 신학적 이해를 토대로 써진 저서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하지만 유대인/교를 피라는 혈통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말년엔 예수마저 소거했으며 궁극적으로는 독일 민족을 숭배한 것으로 치달은 독일 교양의 절정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생각해보자. 19세기 독일만 그랬을까?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서양이든 비서양이든 신학은 자기 시대의 이해와 함께 전통적인 반유대주의를 예수에게 여전히 투사하고 있다. 유대인의 홀로코스트 경험은 신학에서 사유되지 않는 무의식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예수상에 대한 위의 간략한 고찰은 객관적인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예수를 이해하려 했던 근대 신학의 기원에 전통적인 반유대주의가 독일 교양 이데올로기와 결탁해 계속해서 힘을 행사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전이되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신학이 애초에 반유대주의를 사유하기란 더군다나 벗어나기란 불가능한 것 아닌가? 유대인의 고통에 참여함으로써 예수를 새롭게 이해한 샤갈의 「흰 십자가」 는 희망일 수도 있다. 완전한 탈주는 불가능하겠지만 홀로코스트에 대한 관심은 신학이 자기 전통 안에 드리워있는 예수에 대한 반유대주의적 이해를 성찰하고 타자인 유대교와 대화에 나섬으로써 예수를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를 마련해 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