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는 불교적인 이념에 입각한 주제를 그려야 하는 종교화이며, 불교경전에 전거하여 교리적 내용을 시각적으로 도상화 하는 작업이다. 이는 불전을 장엄하면서 직접적인 예배의 대상이기도 하고 교화의 매개체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한국불화는 조선조 두 번의 전란으로 소실, 약탈되었으나 다행히 고려후기와 조선시대 작품 일부가 국내외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본 논문은 조선 영조대인 18세기 중·후반기에 활동한 불화승 두훈의 불화에 대한 연구이다. 두훈은 1755년에서 1775년까지 20년 동안 강원도 건봉사, 경상도 영덕 장육사와 청도 대적사, 선산 수다사, 충청도 보은의 직지사, 경상도 양산 통도사 등의 사찰에 작품을 남긴 화사이다.
두훈은 총 9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수화사로서 조성한 작품은 영덕장육사의 영산회상도(1764), 법주사 괘불도(1766), 통도사 괘불도(1767), 수다사의 시왕도(1771)와 사자도(1771), 통도사 팔상도 중 도솔래의상(1775)이 있다. 또한 참여(보조)화사로서의 작품으로는 건봉사에서 조성한 후 국청사에 봉안된 감로도(1755), 영덕 장육사 지장도(1764), 청도 대적사 신중도(1765)가 있다. 그 외에도 두훈은 1759년 통도사에서 단청화원으로, 1771년 김천 직지사 불상개금불사에서 시주질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두훈 작품의 특징은 먼저 주존을 화면 가득히 최대한 크게 배치한다는 점이다. 장육사 영산회상도에서 보이는 주존과 권속들의 현격한 크기의 차이와 법주사와 통도사에서 조성한 괘불도에서 보이는 주존을 화면에 가득히 배치한 점을 들 수 있다. 또 색채와 문양이다. 두훈의 색채는 대체로 밝은 편이며 법의나 신광 내면에 많은 문양을 표현한 점이다. 특히 장육사의 영산회상도신광 내면에 화문을 빽빽이 채운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괘불도의 법의에도 문양을 촘촘히 배치하였다.
두훈의 또 다른 특징은 괘불도에서 보이는 신광의 표현이다. 법주사와 통도사 괘불도 모두 원형의 두광과 거신광으로 상상할 수 있는 신광이 있다. 그러나 신광은 어깨선 까지만 표현되어 있고 그 이하는 과감히 생략 되어졌는데 이는 주존을 최대한 크게 배치하기 위한 두훈만의 독창적이고 파격적인 구도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두훈의 작품 중에서 1766년 작 법주사 괘불도나 1767년 작 통도사 괘불도 는 18세기를 대표할 수 있는 꽃을 든 독존형의 장엄신 괘불도로서 그 크기가 웅장하고 화격 역시 매우 뛰어나 관련연구자들에게 많이 주목되고 있다. 따라서 이 괘불도는 두훈만의 독특한 화풍과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작품으로 인정할 수 있겠다. 괘불도의 특징은 연화가지를 든 독존상의 보살형 장엄신으로 그려졌고, 화면 전체가 주존 단독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주존의 상체는 크고 넓으며 하체는 짧아 비현실적인 인체비례이다. 전체적인 화면은 묵직하고 중후한 느낌이나 반면 세부적인 이미지는 매우 밝고 화려하며 인물표현 또한 사실적이고 세심하게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이 외에도 수다사의 시왕도 중 다섯 시왕도과 사자도1점, 통도사 팔상도 중 도솔래의 상 1점을 조성하면서 두훈은 상단불화 하단불화 괘불도 등 골고루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두훈은 건봉사에서 1755년 스승인 휴봉의 수하로 처음으로 감로도를 조성하였는데 강원도에서의 작품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이후 1759년 통도사 단청화원으로 활동한 이력이 있는 두훈은 1764년 장육사에서 수화사로서는 처음으로 영산회상도를 조성하였는데 채운과 신광문양, 법의의 문양에서 통도사에서 주로 활동한 임한의 영향을 받은 화풍을 보이게 된다. 1767년 두훈은 임한 이후 불사가 많지 않았던 통도사의 화단에서 괘불도를 조성함으로서 통도사에서의 입지를 굳힌 것으로 보인다.
이로 보아 통도사 불화단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화사임한 화풍은 두훈의 작품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며 두훈 이후 통도사 불화단을 이끈 지연 역시 두훈의 화풍을 일부 이어받은 것으로 본다.